산사의 풍경들.

23. 문경 희양산 품에 안긴 봉암사에서.

죽림, 대숲, 사라미 2016. 5. 17. 09:07



           문경 희양산 품에 안긴 봉암사에서.


    1. 날 짜 : 2016년 5월 14일

    2. 동 행 : 둘째와 함께.

    3. 이야기

          봉암사는 문경시 가은읍 원북리 485에 있는 조계종 사찰로 일년에 한 번 석가탄신일에 개방하는 수행도량이다.

        이 절에는 몇 년전에 온 일이 있어서 그리 서먹하지는 않지만 교통문제가 오늘도 해결되지 않고 있다. 이 날만 되면 경찰관들의 힘이

        특히나 많이 필요한 날이기도 하다.

        전국에서 불자들이 많이 모여드는 봉암사라 오늘도 인산인해 말 그대로다.

        불자들에게 권하고 싶은 말은 모두가 잘 살기 위해 하는 일인데 오늘 하루만 날이 아니니 평소에도 늘 부처님을 찾아 마음의 수양을

        쌓아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어 봄이 어떠냐고 말하고 싶은 하루이기도 하다.

       

     <사진 1>  공양은 절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고 길에서도 하는 힘을 키워야 한다. 이래서 봉암사가 더 유명해진 것인가?



     <사진 2>  멀리 산이 오늘 따라 더 아름답게 보이는 부처님 오신 날.



     <사진 3>  이 나무는 전에도 본 듯한 나무다.



     <사진 4>  여기서 기다리는 곳.



     <사진 5>  다른 방법이 없는지?



     <사진 6>  마을 입구에서 셔틀버스를 내려서 절 까지 걸어가면서 수양.



     <사진 7>  희양산 모습.



     <사진 8>  길 가 산기슭의 병꽃이 예쁘다.



     <사진 9>  이런 길이 계속이다. 다행히 포장을 하지 않아서 걷기에 부담이 적다.




     <사진 10>  봉암사 일주문을 들어서다.

          <희양산 봉암사 유래>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원북리 485에 있는 절.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인 직지사의 말사이다.

            신라 선문구산(禪門九山)의 하나인 희양산록의 종찰(宗刹)로서 879년(헌강왕 5) 당나라로부터 귀국한 지선(智證國士)이 창건한

            이래 현재 까지 선도량으로 일관해온 선찰(禪刹)이다.  창건 당시 지선은 희양산 중턱의 봉암용곡에 신궁을 만들었다고 하였는데

            이는 전통적 선사상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사고방식이지만, 선가(禪家)의 토착화를 위한 한 방편에서 생겨난 것으로 보고 있다.
            881년 나라에서 봉암사라는 이름을 내렸다. 그리고 조선 초기에는 기화(己和)가 1431년(세종 13)에 절을 중수하 뒤 오랫 동안

            머물면서 <금강경오가해설의(金剛經五家解說宜)>를 저술하였다.

            그 뒤 1674년(현종 15) 화재로 소실된 뒤 신화(信和)가 중건하였고, 1703년(숙종 29) 불전과 승료가 불탔으나 바로 중건하였다.

            1915년에는 세욱(世煜)이 다시 퇴락한 당우를 중건하였으며, 1927년 지증국사의 비각과 익량을 세웠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신라 경순왕이 한때 피신힌 것으로 전해지는 극락전이 있는데, 건물의 가구방법이 이채롭고 천장 꼭대기에

            석탑 상륜부의 모양으로 보주를 얹고 있음이 특이하다. 그리고 사문(寺門)과 나란히 있는 요사채 이외에는 모두가 신축된 건물로서

            절 중앙 상부에 대웅전이 있고 대웅전 오른쪽에는 규모가 큰 선원이 있으며 넓은 경내 도처에는 여러 채의 건물이 서 있으나 다른

            절과는 달리 편액을 걸고 있지 않다.



     <사진 11>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을 따라 찾아가는 봉암사 길.



     <사진 12>  희양산 아래 봉암사.



     <사진 13>  경내에 공조팝니무가 꽃을 가득 피웠다.



     <사진 14>  보리자나무도.



     <사진 15>  대웅보전 앞 마당의 축하등들.



     <사진 16>  지증대사탑.


        <봉암사 지증대사탑>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원북리 485에 있으며 보물 제137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탑에는 봉암사를 처음 건립한 지증대사(智證大師, 824-882)의 사리가 모셔져 있다.

        팔각원당형의 이 탑은 신라 헌강왕 8년(882)에 세워졌으며, 여러 장의 판석으로 짜여진 방형의 지대석 위에 각 부의 장식 조각이

        섬세하고 수려하게 제작되어 신라 사리탑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탑의 높이는 3.41m, 지대석 너비 2.28m의 당당한 탑이다.

        지증대사는 경주김씨로 17세에 부석사 경의율사로부터 구족계를 받고 승려가 되었다. 헌강왕 7년(881)에 왕사로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봉암사로 들어와 이듬해인 동왕 8년(882)에 세상을 떠났다. 헌강왕은 대사의 시호를 지증, 탑호는 적조라 내렸다.



     <사진 17>  봉암사 지증대사탑비.


         <봉암사 지증대사탑비>
          국보 제315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가은읍 원북리 485에 있다.
          이 비는 신라말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봉암사를 처음 건립한 지증대의 공적을 찬양하기 위해 신라 경애왕 원년(924)에

          건립되었다. 비문은 신라 말의 학자 고운 최치원이 지었으며, 글씨는 분황사의 승려 석ㅎP강이 썼다.

          용 모양의 비머리와 귀부를 완전히 갖춘 비석으로 귀두는 용두형화(龍頭形化) 되었으며 사산비문(四山碑文)으로 널리 알려진 비이다.

          지증대사는 속성이 김씨(金氏)이고 호는 도현(道憲)이다. 신라 헌강왕 16년(824)에 출생하여 17세에 부석사로 출가하면서 승려가

          되었다. 그가 헌강왕 8년(882)에 봉암사에서 향년 59세로 돌아가자 나라에서 시호를 지증(智證)이라 하고 탑호를 적조(寂照)라 하는

          동시에 탑비를 세우도록 하였다.



     <사진 18>  탑비의 아랫 부분.



     <사진 19>  희양산이 봉암사를 따라다니는가?



     <사진 20>  대웅전.



     <사진 21>  용이 하늘을 나르샤.



     <사진 22>  조사전 뒤도 희양산.



     <사진 23>  잘 자라고 있는 무궁화 한 그루. 이젠 그대로 자라겠지?



     <사진 24>  극락전.



     <사진 25>  봉암사에는 백당나무도 있고 불화도 있다. 특이하다.



     <사진 26>  극락전 앞에는 백당나무와 공조팝나무가 자라고 있다.



     <사진 27>  이 나무가 어디를 돌아서 여기에 왔을꼬?.



     <사진 28>  나무를 사랑하는 마음이 깃든 나무들.



     <사진 29>  나무를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한 봉암사.



     <사진 30>  범종루.



     <사진 31>  점심공양 시간.



     <사진 32>  푸른 하늘에 핀 불두화.



     <사진 33>  극락전 앞에는 공조팝나무와 백당나무가 꽃을 가득.



     <사진 34>  연꽃을 만드는 체험활동.



     <사진 35>  등을 접수하는 곳.



     <사진 36>  마애불 참배길.



     <사진 37>  구도의 길을 따라.



     <사진 38>  고비.



     <사진 39>  구도의 길.



     <사진 40>  시원한 계곡.



     <사진 41>  모두가 속세를 벗어난 것 같은 느낌.



     <사진 42>  한 마디로 신선의 경지에 온 것 같다.



     <사진 43>  아름다운 풍광.



     <사진 44>  봉암사 마애보살좌상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21호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00리 산 54-1
             이 마애불상은 고려말기에 조각된 것으로 전해지며 관련 기록에서는 환적의천선사(幻寂義天禪師) 원불이라 하고 있다.

             높이는 4m, 폭이 4.4m로서 불두(佛頭) 주위를 약간 깊게 파서 불상을 안치하는 방인 감실처럼 만들었으며 광배를 겸하는듯하게

             처리하였다. 불두(佛頭)는 두드러지게 표현하였으나 몸체로 내려오면서 선각으로 얇게 처리하여 불두의 조각 수법과 다르게 하였다.

             머리에 쓰고 있는 보석 왕관의 중앙에는 꽃무늬가 있고, 오른손은 들고 왼손은 가슴에 얹어 연꽃을 들고 결가부좌(結跏趺坐)한

             자세이며, 무릎은 넓고 높아 안정감이 있다. 이러한 형태는 고려 말기의 양식과 통하는 것이다.


            

     <사진 45>  이런 곳에 마애불이 있으니.



     <사진 46>  말 그대로 맑고 아름다운 곳.



     <사진 47>  맑고 아름다운 곳.



     <사진 48>  바위 곁에는 산철쭉이 자리하고.



     <사진 49>  이 곳이 중생들의 쉼터가 되고 있다.



     <사진 50>  물 가에서 자라고 있는 물들메나무.



     <사진 51>  물들메나무.



     <사진 52>  마애불이 자리하고 있는 곳



     <사진 53>  신선의 경지.



     <사진 54>  이 곳에도 꼬리진달래가 자라고 있다.



     <사진 55>  맑고 아름다운 풍광.



     <사진 56>  대팻집나무.



     <사진 57>  다시 보아도 아름다운 희양산.



     <사진 58>  황목련이라고 알려주던 나무.



     <사진 59>  희양산을 다시 한 번 보고.



     <사진 60>  참빗살나무 같기도 하면서 참회나무로 보이던 나무.



     <사진 61>  다시 셔틀버스를 타기 위해.



     <사진 62>  신나무가 한창 꽃을.



     <사진 63>  쪽동백나무도 꽃을 활짝.



     <사진 64>  국수나무.



     <사진 65>  이름 모르는 풀이 잘 가라고 환송한다.




    <덧붙임>  봉암사에 대하여(홈페이지에서 옮겨옴)


              봉암사는 지금부터 약 1100여년전 신라 헌강왕 5년에 지증국사께서 창건한 고찰로서 선종산문인 구산선문의 일맥인 희양산문으로 그 사격이

             매우 당당하다.

             당시 이곳은 신라 문화의 정수인 선풍을 크게 일으켜 구산선문 가운데 희양산파의 주봉을 이루었던 곳이다.

             특히 신라 제 49대 헌강왕은 화풍으로 소폐하고 혜해로 유고할 유신정치를 뜻하고 이었는데 이런 헌강왕의 개혁 의지에 이념을 제공한 것이

             지증대사의 선이었다. 
 
   ▶ 중창불사

            그후 봉암사는 고려태조 18년 정진대사가 중창하였는데 고려시대에도 많은 고승을 배출하여 불교중흥을 이룩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던

           대선찰이다.

           그런데 조선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대부분의 사찰 건물이 소실된 것을 불기 2499년(1955) 금색전 을 비롯해 여러 건물을 다시

           건립하였으며 최근의 도량으로 모습을 일신하게 되었다.

           봉암사는 불기 2526년(1982)부터 종립선원으로 희양산 남쪽 너른터에 자리하고 있다.

           희양산은 백두대간의 단전에 해당하는 높이 998m의 거대한 바위산으로 서출동류하는 30리 계곡을 끼고 있어 천하 길지로 이름나

           있다. 멀리서 보면 우뚝한 모습이 한눈에 영봉임을 알수 있는데 봉황과 같은 바위산에 용과 같은 계곡이 흐로고 있어 예로 부터

           봉암용곡이라 불렀다.

           봉암사는 신라 헌강왕 때인 879년 지증도헌 국사가 창건하였다.

           당시 심층거사가 대사의 명성을 듣고 희양산 일대를 희사하여 수행도량으로 만들 것을 간청하였다.

           대사는 처음에 거절하다가 이곳을 둘러보고 "산이 병풍처럼 사방에 둘러쳐져 있어 봉황의 날개가 구름을 흩는 것 같고 강물이 멀리

           둘러 쌓였는 즉 뿔 없는 용의 허리가 돌을 덮은 것과 같다."며 경탄하고 "이땅을 얻게 된 것이 어찌 하늘이 준 것이 아니겠는가.

           스님들의 거처가 되지못하면 도적의 소굴이 될것이다" 라 하며 대중을 이끌고 절을 지었다.

           지증대사가 봉암사를 개산하여 선풍을 크게 떨치니 이것이 신라 후기에 새로운 사상흐름을 창출한 구산선문 중 하나인 희양산문이다.

           그 후 후삼국의 대립 갈등으로 절이 전화를 입어 폐허화되고 극락전만 남았을 때인 고려태조 18년 정진대사가 중창하여 많은 고승을

           배출하였다.

           조선조 세종대왕때 험허당 기화 스님이 절을 중수한 뒤 머물면서 원각경소 를 저술하였고. 1674년 다시 소실된 절을 신화 스님이

           중건하였으며 1703년 다시 중건하였으나 이후 크게 쇠퇴하였다.

           구한말 1907년 의병전쟁 때에 다시 전화를 입어 극락전과 백련암만 남고 전소되었다.

           1915년 윤세욱스님이 요사와 영각, 창고 3동을 신축하였고, 1927년에는 지증대사의 비각과 익랑을 세웠다. 근래에 들어 당시

           조실을 지낸 전 조계종 종정서암스님과 주지 동춘스님 후임 원행, 법연스님등의 원력으로 절을 크게 중창하여 수행도량으로 면모를

           일신했다.

           지증대사 적조탑, 지증대사적조탑비, 정진대사 원오탑,정진대사 원오탑비, 봉암사 삼층석탑등의 성보문화재가 옛 선사의 향기를

           은은하게 전하고 있다.

  
   ▶ 선원의 역사

             봉암사 선원의 역사는 저 멀리 신라 후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지증대사 도헌스님이 구산선문중 하나인 희양산문을 이곳에서 개창하였던 것이다.

           이후 태조 18년 정진대사가 사찰의 소임을 볼때는 봉암사에 3천여 대중이 머물러 동방장과 서방장으로 나누어 정진을 할 정도였다.

           이러한 분위기가 계속 이어져 '태고 보우국사'를 비롯한 많은 수행자들이 이곳에서 정진하여 "동방의 출가 승도는 절을 참배하고 도를

           물을 때 반드시 이곳 봉암사를 찾았다" 고 한다. 이렇게 유서 깊은 선사 봉암사에 근대 선원이 다시금 부흥된 것은 1947년이다.

           해방직후 사회적 혼란이 극심한 상황에서 봉암사는 한국불교의 현대사에서 새로운 흐름을 창출한 결사도량으로 거듭난다. 이름하여

           '봉암사 결사' 가 그것이다. 봉암사 결사는 1947년 성철스님을 필두로 청담. 자운. 우봉스님등 4인이 "전체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임시적인 이익 관계를 떠나서 오직 부처님 법대로 한번 살아보자. 무엇이든지 잘못된 것은 고치고 해서 부처님 법대로만 살아보자."는

           원을 세우고 결사도량을 찾으니 그 곳이 봉암사였다

           그 후 청담. 행곡. 월산. 종수. 보경. 법전. 성수. 혜암.도우등 20인이 결사에 참여하였다. 당시 결사대중은 공주 규약을 제정하여

           추상같은 법도를 세워 오늘날 수행의 근간을 세웠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결사정진도 1950년 한국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중단되는

           안타까운 현실에 처하게된다.

           그후 1970년 초부터 다시 수좌들이 봉암사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불교신문 기록으로 보건대 봉암사 희양선원은 1972년 향곡스님을

           조실로 모시고 15명의 납자가 정진했다.

           이후 1974년에 서옹스님이 조실을 맡은 것을 제외하고는 78년까지 향곡스님이 줄곧 조실역활을 하면서 납자를 제접했다.

           1980년경 서암스님이 정식으로 태고선원 조실로 모셔지면서 선원은 청룡의 승천과 봉황의 날개짓처럼 웅대한 자태를 희양산 자락에

         펼치게 되었다.

         1982년 6월 종단은 봉암사를 조계종 특별 수도원으로 지정하여 성역화 의지를 표명하였다.

         1982년 7월 문경군에서는 사찰 경내지를 확정 고시하였다 그래서 희양산 봉암사 지역은 특별 수도원으로 일반인의 출입을 막아

         동방제일 수행 도량의 분위기를 조성하였던 것이다. 이어 1984년 6월 제 13차 비상종단 상임위원회에서는 선풍 진작과 종단 발전을

         위해 봉암사를 종립선원으로 결정했다.

         그리고 1994년 범룡스님이 조실로 추대되어 2년여간 납자를 제접하여오다, 2000년 하안거 해제에 진제스님을 조실로 모셨으며

         그후 2001년 하안거 결제에 서암스님을 다시 조실로 추대하여 대중 스님들을 지도 하시다가 2003년 3월 29일 날 열반에 드셨습니다.



   ※  감사합니다. 오늘이 부처님 오신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