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사의 풍경들.

71. 제석사(帝釋寺)에서 원효를 보다.

죽림, 대숲, 사라미 2022. 1. 28. 16:33

 

            <제석사(帝釋寺)에서 원효를 보다.>

 

1. 날짜 : 2022년 1월 26일

2. 동행 : 나미회 회원

3. 이야기

삼성현(三聖賢)으로 알려진 경산시 진량면 일대에서 원효대사가 태어났다는 제석사(帝釋寺)를 찾았다.

원효대사의 탄생지라서 찾았기도 하지만, 이에 못지않게 경내에서 자라는 나무를 이름답게 가꾸어놓은 곳이라 이를 보고싶어 찾았다.

원효대사는 당대 뿐아니라 오늘날 까지도 훌륭한 사람으로 추앙받고 있는 성인이다.

제석사는 다른 절과 달리 산이 아닌 시내에 자리한 절이다. 해마다 단오날 원효대사가 태어남을 경축하고 그 가르침을 전승하려는 다례재(茶禮齋)가 열리는 곳이라 마음으로 동경해오던 절이다.

일주문에서니 말로만 듣던 나무가 마치 용트림을 하면서 길손을 맞는다. 용이 승천하는 꿈을 꾼 일이 있는지 마치 용이 지붕을 휘감아 승천하는 모습 같이 느껴진다. 매우 신기한 모습이다. 예전에는 이 나무 그늘에서 더위를 피하면서 원효대사를 찾았으리라. 나무는 팽나무다. 열매를 먹기도 하고 약용으로 쓰기도 한다. 절에서 어떻게 이렇게 나무를 아끼고 사랑할수 있었을까? 정말 대단하신 스님들이 계신 곳이라 생각되고 감탄을 금할수 없다. 이렇게 키워주신 스님과 신자님들 그리고 나무 또한 잘 자라서 서로 소통이 잘 되어서 훌륭한 자연의 작품으로 탄생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원효대사도 훌륭하지만 나무 또한 제일이라.

제석사는 원효성사 이야기로 가득한 곳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오늘 돌아본 내용을 올려본다.

 

제석사(帝釋寺)는
원효의 어머니 조씨(趙氏) 부인이 유성(流星)이 품에 안기는 태몽을 꾸고 원효를 잉태하여 만삭이 되었을 때 불지촌(佛地村) 북쪽 율곡(栗谷)의 밤나무 아래를 지나다가 홀연 산기(産氣)를 느껴 남편의 옷을 밤나무에 걸어 산실을 마련하고 해산하게 되었는데, 이때 하늘에서 오색구름이 내려와 땅을 덮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 밤나무를 사라수(裟羅樹)라 부르게 되었으며, 그 밤나무 열매의 크기와 굵기가 보통과 달라 사라율(裟羅栗)이라 불렀다고 전해지고 있다. 후에 원효는 자신이 태어난 밤나무 옆에 절을 지어 사라사(裟羅寺- 지금의 제석사)라 하였다.
제석사에서는 원효성사의 탄생일에 맞춰 매년 음력 5월 4일 ‘원효성사 탄신 다례재’를 봉행하고 있다. 다례재(茶禮齋)는 원효성사 탄생을 봉축하고, 그의 삶과 정신을 기리고 가르침을 계숭하기 위해 삼성현(三聖賢-원효, 설총, 일연)의 고장 경산시의 연례행사로 정례화되었다.
2003년 제석사 경내에 원효 팔상탱화(八相幁畵)와 성상(聖像)이 봉안된 원효성사전(元曉聖師殿)이 최초로 건립된 후 일본의 ‘사천왕사 왔소’ 답사팀이 원효성사 탄생을 경축하기 위하여 방문하기도 하였다.
아울러 자인면에서는 원효성사 탄생일 다음 날인 음력 5월 5일 단오절이 되면 매년 경산자인단오제(慶山慈仁端午祭)가 성대하게 거행된다.
경산자인단오제는 국가무형문화재 제44호로 지정 보존되고 있다.(안내문에서)

 

 

 

<사진 1>  제석사 들어가는 문이다. 사천왕벽화에 위에는 '도천산제석사'라 하였다. 잘 자란 나무가 보인다.

 

 

<사진 2> 대웅보전이다. 안에는 세 분의 부처님을 모셨다.

 

 

<사진 3> 나무가 일주문 옆에서 이렇게 자라고 있다. 나무는 팽나무.

 

 

<사진 4> 안에서 본 제석사 일주문이다. 나무는 이렇게 자라고 있다.

 

 

<사진 5> 원효대사가 태어나신 곳이라 '원효성사전'이 있다. 원효대사는

 

  원효성사(元曉聖師, 617-686)

 

 속성(俗姓)은 설(薛), 아명(兒名)은 서당(誓幢), 시호(諡號)는 화쟁(和諍)이다. 볍명(法名)은 스스로 원효(元曉)라고 지었는데, 이는 불교를 새로 빛나게 한다는 뜻이며 당시 사람들은 ‘새벽(始旦)’이라는 뜻의 우리말로 불렀다고 전해진다.


 617년(진평왕 39년) 압량군(押梁郡) 불지촌(佛地村) 북쪽(지금의 자인면) 율곡(栗谷)에서 태어나 15세 경 출가하여 집안의 재산을 희사(喜捨)하고 자신의 집을 절로 지어 초개사(初開寺)라 하고 자신이 태어난 사라수(裟羅樹) 곁에 사라사(裟羅寺 – 지금의 제석사-帝釋寺)를 세웠다.


 특별하게 한 명의 스승을 정해놓고 배우지는 않았으며 스스로 깨달음을 얻었다고 전해지는 원효는 661년(문무왕 1년) 의상과 함께 당나라로 유학길을 떠났으나, 가는 길에 오래된 무덤에서 잠을 자던 중 갈증을 느께 손을 뻗어 잡히는 바가지의 물을 달게 마신후 다음 날 일어나 그 물이 해골에 괸 물임을 안후 ‘이 세상의 온갖 현상은 모두 마음에서 일어나며, 모든 법은 오직 식(識)일 뿐이다. 마음 밖에 법이 없는데, 어찌 따로 구할 필요가 있겠는가 라는 깨달음을 얻고 유학길을 되돌아왔다는 유명한 일화가 전해진다.
그 뒤 분황사(芬皇寺) 등에 머무르며 경(經), 율(律), 론(論) 연구와 화엄경소(華嚴經疏) 등의 저술에 힘썼다.

 

 요석공주(瑤石公主)와의 사이에서 설총(薛聰)을 낳고 사계(捨戒)한 뒤 스스로 소성거사(小姓居士)라 칭하며 서민 삶으로 들어가 민중 속에서 부처님의 교법(敎法)을 전하였다. 그는 사람들에게 본래의 마음을 깨달으면 정토(淨土)를 이룰수 있으며 입으로 부처의 이름을 외우고 귀로 부처의 가르침을 들으면 성불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이러한 원효의 활동으로 신라의 백성들은 모두 부처의 이름을 알고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의 염불을 외우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말년에는 황궁에서 ‘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을 강의하고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을 저술하였으며, 686년(신문왕 6년) 혈사(穴寺에서 70세의 나이로 입적하였다.

 

 그가 죽은 뒤에 아들인 설총이 그의 유해로 소상(塑像)을 만들어 분황사에 봉안하였고, 입적후 400여년이 지난 고려 숙종 떼 대각국사 의천의 건의로 ‘대성화쟁국사(大聖和諍國師)’라는 시호가 내려졌다.(안내문에서)

 

 

<사진 6> 원효성사 탄생지 유허비와 제석사중건기념비석들.

 

 

<사진 7> 나무를 자르지말고 마음껏 크도록 두었으면 어떨까?

 

 

<사진 8> 나무가 자라는 모습

 

 

<사진 9> 원효매(元曉梅)가 잘 자랐으면 좋겠다. 이왕이면 적당한 장소에 밤나무도 한 그루 심었으면!

 

 

<사진 10> 삼성각이다. 가까운 곳에 잘 자란 느릅나무가 있었다고 하는데 아까운 나무가 보이질 않는다고 한다.

 

 

<사진 11> 제석사 우물이다. 깊이가 약 16m 정도 된다고 했다. 큰 느릅나무가 있었더라면 더욱 좋았을 것을 !

 

 

<사진 12> 원효성사의 흔적을 이야기 하였다.

 

 

<사진 13> 대웅보전과 원효성사전 모습.

 

 

<사진 14> 이 나무가 자꾸 생각나겠지?

 

 

<사진 15> 저 푸른 하늘에 날개를 펴는 나무가 되기를 바라며 일주문을 나선다.

 

 

 

 

 

 

※  감사합니다. 경산 자인의 역사를 더듬으며 살펴본 제석사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