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민속촌에서.>
1. 날짜 : 2021년 1월 26일
2. 동행 : 나미회 회원
3. 이야기
'영남민속촌'이란 이야기는 처음 들었다.
내용인즉 주변에서 배움에 도움이 되는 자료들을 한데 모아서 활용할 수 있게 한 곳인데 지금 까지 알지못하고 있었으니 내가 생각해도 도움이 안되는 일이다.
영남민속촌은 영남대학교 안에 위치하고 있다.지금 까지 영남대학교 교정은 몇 번 다녀보았는데 영남민속촌 이야기는 들어본 일도 없고 알고자 한 일도 없었다.
그래서 오늘 본 내용을 실제 모습과 함께 소개하고자 한다.
영남민속촌은
1975년 교내부지 2만여평 위에 조성된 민속촌은 아시아에서 최초일뿐아니라 가장 큰 대학야외박물관(大學野外博物館)이다.
민속촌에는 안동수몰지역과 경주, 칠곡에서 옮겨운 옛집(古家)들과 경주(慶州) 인왕동(仁旺洞) 고분군(古墳群) 복원지가 있다.
민속촌에는 조선시대 사립교육기관(私立敎育機關) 중의 하나였던 구계서원(龜溪書院)과
화산서당(花山書堂), 진보 현감을 지낸 이중철(李中喆)이 건립했던 의인정사(宜仁精舍), 의성김씨 정려문(旌閭門), 선비들의 외별당(外別堂)인 일휴당(日休堂)과 쌍송정(雙松亭) 그리고 경주 황룡사지(皇龍寺址)에 있었던 경주 맞배집과 안동군 도목동에서 옮겨온 까치구멍집이 있다.
민속촌으로 옮겨온 옛집들은 조선시대의 여러 계층의 집과 생활문화를 골고루 갖추고 있어서 조선시대 사람들의 생활모습을 두루 보여준다.
<자료 1> 민속촌 안내.
<자료 2> <천하영남대장군>과 <지하영남대장군>에 대하여.
본 벅수(장승)는 ‘천하영남대장군’과 ‘지하영남대장군’으로 김진석 대목수(양백 대표, 영남대 조소과 87학번)께서 직접 제작하여
기증해 주신 작품이다.
<자료 3> 구계서원(龜溪書院).
원래 있던 곳 - 경상북도 안동군 월곡면 미질동
고려말 유학의 큰 스승 역동(易東) 우탁(禹倬) 선생을 모시고 있는 서원.
안동댐이 만들어지면서 1975년에 현재 위치로 옮겼다.
<자료 4> 쌍송정(雙松亭)
원래 있던 곳 – 경상북도 봉화군 물야면 북리리
봉화금씨 금혜(琴嵆, 1399-1484)선생의 후손들의 소개로 1975년 7월 이 곳으로 옮겼다. 쌍송정은 금혜 선생이 북지리의 본가 옆에 서재로 지은 별장이다.
선생은 호를 ‘쌍송정(雙松亭)’이라 하고 이 건물앞에 용트림하는 소나무 두 그루를 심어 즐겼는데 ‘쌍송정’이라는 건물 이름 역시 이로부터 유래하였다.
<자료 5> 일휴당(日休堂)
원래 있던 곳 – 경상북도 안동군 예안면 오천동
안동댐이 만들어져 1974년 11월에 이 곳으로 옮겨온 건물로 임휴당 금응협(琴應夾, 1526-1586) 선생이 제자를 가르치기 위해 지은 별장이다.
금응협 선생은 쌍송정 금혜의 후손이며 벼슬은 익찬을 지냈고 퇴계 이황 선생의 문인으로 오천(烏川) 7군자중 한 분이다.
<자료 6> 경주맞배집
원래 있던 곳 – 경주시 구황동 황룡사지
경주 맞배집은 경주 구황동 활룡사지에 있던 집으로 황룡사지 발굴과 함께 1976년 현재 위치로 옮겨왔다.
이 집은 ‘一’자형 모양을 하고 있는데 왼쪽부터 부엌, 안방, 대청, 건너방 순으로 되어있다.
<자료 7> 경주 인왕동 고분군 복원지.
원래 있던 곳 – 경주시 인왕동 고분군내.
영남대학교 박물관은 봉분(封墳)이 없어지고 폐허가 되어 유물이 도난당할 우려가 있는 인왕동 고분군을 1977년 9월 5일부터 1978년 2월 22일 까지 발굴조사
했다.
발굴후 유물의 학술적 가치를 평가하여 교육자료로 이용하기 위해 박물관 민속촌에 이를 복원하였다.
<자료 8> 화산서당(花山書堂)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 220호
원래 있던 곳 – 경상북도 칠곡군 석적면 중리
화산서당은 조선 효종 2년에 만회당 장경우 선생이 후진을 양성하기 위하여 석적면 성곡리 화산 아래에 세운 서당이다.
그 후 화산서당은 사림(士林)의 공의(公議)에 따라 현종 6년(1840)에 석적면 중리로 이건 되었으며, 철종 4년(1853)에는 묘우 낙성과 더불어 화산서원으로
승원되어 만회당의 봉향지소(奉享之所)가 되었다.
그러나 고종 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하여 묘우는 훼철되고 강당만 남게 되면서 화산서원은 다시 화산서당으로 되었다.
<자료 9> 의인정사(宜仁精舍)
원래 있던 곳 – 경상북도 안동군 도산면 의인마을
의인정사는 조선조 성리학의 큰 스승인 퇴계 이황 선생의 후손으로 진보현감을 지낸 이중철이 1887년에 지은 집이다.
이 집의 택호(宅號)는 진보댁(眞寶宅) 이었으나 1976년 현재의 자리로 옮겨지면서 이 집이 있었던 의인마을의 이름을 따서 의인정사라 하였다.
이 집은 모두 56칸으로 전형적인 안동 양반집 가옥의 하나이다.
안채, 사랑채, 아래채로 구성되어 있는데 사랑채는 외부에 개방하여 남성(男性) 공간의 중심으로 삼고 안채는 중문으로 막아 여성(女性) 공간의 중심으로 삼았다.
집 입구 대문 옆에는 행랑채를 세우고, 안채 부엌 뒤편 외진 곳에는 찬모방과 디딜방아간을 두었다.
<자료 10> 까치구멍집
원래 있던 곳 – 경상북도 안동시 월곡면 도목동
까치구멍집은 지붕 용마루의 양쪽에 공기 유통을 위하여 구멍을 낸 모양이 까치둥지와 비슷하다하여 붙은 이름이다.
영양남씨(英陽南氏)들이 모여 살았던 안동시 월곡면 도목동에서 1975년 현재의 자리로 옮겨왔다.
경북 북부지역 산간촌에서 볼 수 있는 독특한 형태의 집이다. 이 집은 안방과 사랑방, 정지, 마굿간 등을 모두 집 안쪽에 위치하게 하여
겨울철에는 난방의 열을 이용하여 가축을 보호하는 등 사람과 가축이 하나의 지붕 아래 공간을 나누어 함께 살도록 된 집중형 주거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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