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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충주 충렬사(忠烈祠를 찾아서.

죽림, 대숲, 사라미 2016. 4. 4. 18:24

 

 

           충주 충렬사(忠烈祠)를 찾아서

 

    1. 날 짜 : 2016년 4월 1일

    2. 동 행 : 가족과.

    3. 이야기

   해마다 4월 1일에는 평택임씨 중시조인 1세와 2, 3세 할아버지를 추모하는 제를 올린다. 장소는 충렬사에서 가까운 숭모사다.

 여기에 참석할 때면 꼭 충렬사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충렬사를 돌아보는 것이 연례 행사처럼 되었다.

  시기가 봄이라 충렬사 주변에는 많은 나무들이 새잎을 키우고 또 아름다운 꽃을 피운다.

  충민공 충렬사는 사적 제189호로 저정되어 있으며 조선 인조 임금 때의 임경업(1594-1646) 장군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숙종 23년(1697)에 건립하고 영조3년(1727)에 사액되어 봄과 가을에 제를 올린다. 장군의 충렬비와 부인 완산(전주)이씨의

  정열비가 있는데 충렬비는 정조15년 왕이 친히 글을 지어 비석에 새겨 전하게 한 어제달천충렬사비다. 비문은 조선 금석촐람에

  실려 있다.

  선조27년(1594)에 임정의 후손인 임 황의 아들로 충주 대림산 기슭에서 태어나 자는 영백, 호는 고흥, 시호는 충민공이고 본관은 평택이다.

 

 충렬사에 들어서면 하마비가 손님을 기다리고 그 좌우로 스트로브잣나무가 두 줄로 서서 방문객을 맞는다. 경내에 많은 나무들이 심어져 있는데 나라 사랑하는 장군의 위패가 있는 경내에 용케도 무궁화는 한 그루도 보이질 않는다.

그래서 충주시에 건의는 했지만 사람들 모두가 나무에 대하여 관심이 너무 없다는걸 다시 실감하였다. 정화사업을 마치고 박정회

대통령이 이 곳을 방문하여 기념식수를 한 주목은 아주 잘 크고 있는데 당시 무궁화에 대한 생각은 왜 못했을까 적잖이 궁금하였다.

앞으로는 무궁화가 심어져서 우리나라의 기상을 더욱 떨치게 될 것이라 기대해본다. 내년에도 또 방문할 예정이라서.경내에 심어진 나무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사진 1>  충렬사 전경.

 

 

 

    <사진 2>  튤립나무가 작년의 자취를 달고 있다.

 

 

 

 

    <사진 3>  등나무가 2그루 있는데 나이가 100년은 넘었을것 같이 보였다.

 

 

 

 

    <사진 4>  연못 주변에 심은 소나무.

 

 

 

 

    <사진 5>  연못과 주변의 나무들.

 

 

 

    <사진 6>  사당 주변의 모습.

 

 

 

 

 

    <사진 7>  진달래도 경내에서 자란다.

 

 

 

 

    <사진 8>  백자목련.

 

 

 

 

    <사진 9>  백목련이다. 목련은 아닌것 같다.

 

 

 

 

    <사진 10>  정문이다. 오른쪽으로 들어가고 왼쪽으로 나온다

 

 

 

 

    <사진 11>  오른쪽은 스트로브잣나무, 왼쪽은 전나무,

 

 

 

 

 

    <사진 12>  몇 해 전에 심은 소나무인데 제법 모양이 되어 간다.

 

 

 

 

 

 

    <사진 13>  섬잣나무.

 

 

 

 

    <사진 14>  스트로브잣나무의 줄기다.

 

 

 

 

    <사진 15>  갈성문(竭誠門) - 정성을 다한다는 뜻이 담긴문.

 

 

 

 

    <사진 16>  갈성문.

 

 

 

 

    <사진 17>  왼쪽은 어제달천충렬사비각, 오른쪽은 완산(전주)이씨정부인정렬비각.

 

 

 

 

    <사진 18>  충주 충렬사비에 대하여.

 

 

 

 

    <사진 19>  충주 충렬사비

 

 

 

 

    <사진 20>  정렬비에 대하여.

 

 

 

 

    <사진 21>  정렬비.

 

 

 

 

    <사진 22>  진무문을 들어서면 충렬사.

 

 

 

 

    <사진 23>  충렬사에 참배를 마치고.

 

 

 

 

    <사진 24>  박정희 대통령 기념식수목인 주목.

 

 

 

 

    <사진 25>  정화사업 기념비.

 

 

 

 

    <사진 26>  유물전시관.

 

 

 

 

    <사진 27>  전시되어 있는 충렬사 현판인데 사액된 현판이다. 그런데 임금의 도장을 오려냈다. 일제시대에.

 

 

 

 

    <사진 28>  임경업 장군이 평소 애용하던 칼 추련검.

 

 

 

 

    <사진 29>  속리산 신선대 아래에 있는 큰 암석.

 

 

 

 

       ※  임경업 장군에 대하여 더 이해를 하려면 당시의 정치 상황을 이해하는 일이 중요하다. 그래서 참고로 역사적인 사실을 소개합나다.

            이글은 다른 곳에서 옮겨왔습니다.

 

      ※인조반정(1623)※

          1623년(인조 1년) 서인 일파가 광해군 및 대북파를 몰아내고 능양군 종(후의 인조)을 왕으로 옹립한사건이다.

          선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당론의 폐해를 통감하고 이를 초월하여 좋은 정치를 해보려고 애썼으나, 자신이 대북파의

          도움을 받아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당론을 초월할 수 없었다.

          처음에는 이원익·이항복·이덕형 등 명망 높은 인사를 조정의 요직에 앉혀 어진 정치를 행하려 하였으나, 이이첨·정인홍 등 대북파의

          무고로 친형 임해군과 이모제 영창대군을 죽였으며, 또 계모인 인목대비를 유폐하는 패륜을 자행하였다.

          이와 같이 광해군의 실정이 계속되어 기강이 문란해지자 서인 이귀·김자점·김류·이괄 등은 반정을 모의, 1623년 3월 21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모든 계획을 추진하였다.

          도중에 이이반의 누설로 탄로될 위기에 놓였으나 예정대로 거사를 단행하였다.
          이서는 장단에서, 이중로는 이천에서 군사를 일으켜 홍제원에서 김류의 군대와 합류하였다.
          이 군대를 능양군이 친히 거느리고 이괄을 대장으로 하여 12일 밤에 창의문으로 진군하여 훈련대장 이흥립의 내응으로 반정군은

          무난히 궁궐을 점령하였다.
          이어 왕대비(인목대비)의 윤허를 얻어 능양군(인조)이 왕위에 올랐다.

          광해군은 의관 안국신의 집에 피신하였다가 잡혀 서인이 되었으며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대북파 이이첨·정인홍·이위경 등 수십 명은 참수되었으며, 추종자 200여 명은 유배되었다.
          반정에 공을 세운 이귀·김류 등 33명은 3등으로 나누어 정사공신 호를 받고 권좌의 요직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이 논공행상이 공평하지 못하다 해서 1년 후에 이괄의 난이 일어났다.
          반정 후 남인의 이원익이 영의정에 영입됨으로써 남인도 제2의 당세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괄의 난(1624년)※

          1624년(인조 2) 평안병사 이괄이 인조반정의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일으킨 반란.

          이괄은 인조반정에 공이 많았는데도 논공행상에는 반정계획에 늦게 참가하였다 하여 2등공신이 되고 한성부윤에 임명되었다.

          그러던 중 후금의 관서 지방 침입에 대비하면서 이괄을 부원수 겸 평안병사에 임명하여 도원수 장만 휘하에 소속시켰다. 이괄은 이에

          대한 불만으로 반란을 일으켜 개천을 점령하고 평양으로 진격하였다.

          조정에서는 이때 영의정 이원익을 도체찰사로 삼아 반란군을 토벌하게 하였으나 이괄의 부대는 중앙에서 보낸 군대를 격파하고 한성

          까지 점령하였다.이에 이괄은 선조의 열번째 아들 흥안군을 왕으로 추대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정부군의 패잔병을 수습한 장만은 그날 밤 바로 한성 근교의 안령에서 이괄의 부대를 크게 파하였다.
          이에 패잔병을 이끌고 광희문을 빠져나온 이괄은 경기도 이천으로 달아났으나 자신의 부하 기익헌·이수백 등에 의해 죽음을 당하였다.

          그리고 기익헌·이수백이 관군에 투항하면서 반란은 평정되었다.

 

      ※심기원의 옥※

          1644년(인조 22) 남한산성 수어사로 있던 심기원이 회은군 덕인을 왕으로 추대하려다가 복주된 사건.
          심기원은 유생의 신분으로 인조반정에 참여하여 1등공신에 녹훈되었고 청원부원군에 봉해진 인물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을 지내기도 하였다.

          그런데 그가 1644년(인조 22) 좌의정으로 남한산성 수어사를 겸하였을 때 회은군을 추대하여 반란을 꾸몄다는 고발을 받아 여러

          공모자가 죽임을 당한 것이다.
          그 모의의 사실 여부는 확실하지 않지만, 그 사건의 전모는 심기원이 자신의 심복 장사들을 호위대에 두고 이일원·권억 등과 함께

          회은군을 추대하기 위해 모반을 꾀한 것으로 밝혀져 있다.

          이 사건은 심기원의 부하였던 황헌·이원로 등이 훈련대장 구인후에게 밀고함으로써 드러났는데, 그 결과 심기원 일당과 회은군은

          죽임을 당하였다. 이때 중국에 잡혀가 있던 임경업도 이 모반에 연루되었다고 해서 소환되어 고문을 받다가 죽었다.

          그리고 병자호란 뒤에는 심기원·최명길이 협력하여 김자점 중심의 세력과 대립하고 있는데, 이 사건을 계기로 인조대의 정국은

          김자점에 의해 권력이 독점되었다.

 


      ※김자점의 역모사건※

          1651년(효종 2) 김자점의 반역행위로 야기된 옥사.

          봉림대군은 효종 임금에 즉위하여 병자호란으로 당한 국치를 설욕하고자 김상헌 등의 신하들과 협의하여 청나라를 정벌할 계획을

          세웠다.
          본래 친청파였던 김자점은 영의정에서 파직된 뒤 기회를 노리고 있던 차 그 소식을 듣고 청나라 관계 요인에게 밀고하는 한편,

          송시열이 지은 장릉의 지문을 청나라에 보냈다. 이 지문에서는 청나라의 연호를 쓰지 않고 명나라 연호를 썼으므로, 청나라는 대군을

          국경에 배치하고 그 진부를 힐문하였다.
          조정에서는 영의정 이경석의 노력에 힘입어 이를 수습하여야 하였다.

          그런데 1651년(효종 2) 12월에 진사 신호 등이 상소하여 김자점의 역모를 고하였다.
          이에 효종은 인정문에서 김자점의 아들 익 등을 심문하였고, 익은 공모한 무장들을 모두 실토하였다.
          이 과정에서 인조의 후궁이자 효명옹주의 어머니인 조귀인이 자신의 며느리인 숭선군의 아내 신씨를 저주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효종은 조귀인을 사사하는 한편, 김자점 및 그의 손자이며 조귀인의  사위인 김세룡을 국문하여 이들을 처형하였다.

          이로써 김자점의 일파는 완전히 숙청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