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를 찾아

218. 안동 송천동 모감주나무를 찾아서.

죽림, 대숲, 사라미 2016. 5. 3. 09:49



           안동 송천동 모감주나무를 찾아서.


    1. 찾은 날짜 : 2016년 4월 27일

    2. 동 행 : 나미회 모임.

    3. 이야기

          현재 경상북도 기념물 제50호로 지정되어 있고, 나이가 약 300년이 훨씬 넘은 키 15m, 가슴 높이 지름 37cm의 큰 나무다.

        모감주나무는 우리나라에서는 대구 및 경상남북도, 경기 및 황해도에서 자라며 무환자나무과에 속하는 낙엽교목이다.

        한방에서 간염, 이질 등의 치료제로 쓰기도 하며 둥글고 검은 열매는 염주를 만들기도 한다.

        이 나무는 동래정씨(東萊鄭氏) 석문공파(石門公派) 종중(宗中) 소유다.

        일설에 의하면 석문(石門) 정영방(1577-1650)이 살아 있을 때 아끼던 나무인데 죽은 후 그의 아들이 조선 효종(孝宗) 2년(1651)

        봄에 영양군 입암면 연당동 자양산에서 이 곳으로 옮겨 심었다고 전한다(안내자료 참조 작성)


    <사진 1>  석문공이 지은 읍취정(挹翠亭)이다. 이 곳에서 보면 앞을 흐르는 반변천 부근에 선어대가 있어 경치로는 일품이라 한다.



    <사진 2>  모감주나무의 뿌리가 바위를 둘러싸고 있다. 공사로 인한 변동이 아닌지? 그렇다면 당시에 있던 상태로 만들어 주었으면.

 


    <사진 3>  모감주나무에 새싹이 돋아나고 있다.



    <사진 4>  읍취정에서 본 앞의 경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석문 정영방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덧붙입니다.>

       본관이 동래로 1577년(선조 10) 예천 용궁현 포내 (현, 풍양면, 우망리) 에서 태어났다.

     이모부였던 정정세로부터 학문을 배워 1605년(선조 38) 진사시에 합격했다. 학문이 깊고 인격이 훌륭한 그를 아깝게 여긴 우복선생이

     벼슬길에 나아가기를 권했으나 광해군의 실정과 당파로 싸움이 끊이지 않는 정국(政局)을 보면서 초야에 묻혀 살기를 원했다고 한다.

     이윽고 터진 병자호란으로 나라가 다시 시끄러워지자 세상과 담을 쌓기 위해 첩첩 산중인 영양군 입암으로 거처를 옮겨 네째 아들 제와

     함께 지내며 경정(敬亭)을 짓고 연못을 파 상서로운 돌이 가득한 곳이라는 뜻에서 서석지라 이름을 짓고 자연을 벗 삼아 소요하며 학문을

     연마했으며 매(梅), 국(菊), 죽(竹)과 함께 소나무를 사우(四友)라 좋아했고 모감주나무를 사랑했던 것 같다.

     모감주나무의 조경적 가치를 우리나라에서 맨 처음으로 인정한 분이 아닌가 한다.

     그에게는 4명의 아들이 있었다.

     영양으로 거처를 옮기기 전 20세 때 읍취정(挹翠亭)을 짓고 안동 송천에서 살았는데 둘째 아들 행은 효성으로 아버지를 모셨고

     1650년 (효종 1) 만년에 다시 돌아와 사실 때에도 또한 같았다. 그러나 천명은 어쩔 수 없어 그 해 향년 74 세로 이승을 마감하고 만다.

     이듬해 행이 아버지가 살았던 영양군 자양산를 찾아가서 평소 아버지가 좋아했던 나무 한 그루를 캐가지고 와서 심은 것이 지금의

     모감주나무다.

   ※  감사합니다. 우리 나라의 3대 민간정원으로 꼽히는 영양군의 서석지가 있어 이야기를 덧붙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