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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한국가사문학의 산실을 찾아서(1).

죽림, 대숲, 사라미 2017. 1. 22. 20:20



           한국가사문학의 산실을 찾아서(1).


    1. 날 짜 : 2017년 1월 18일

    2. 동 행 : 대경예임회 문화탐방(제411회 정기 모임)

    3. 이야기

          정자는 그늘에서 쉬는 것만이 아니라 자연 속에서 우리 가사문학(歌辭文學)의 기틀을 잡고 발전시키는 역할을 담당하였던 담양을

        중심으로 가사문학 탐방에 나섰다.

        오늘 하루는 가사문학에 대한 교양을 쌓기 위해 아침 9시 20분 대구-광주 고속도로를 달려 12시 경 담양 명옥헌 일원 주차장에 도착

        하였다.

        명옥헌 일원, 식영정 일원, 한국가사문학관, 소쇄원, 면앙정을 돌아보았는데 모두의 공통점은 자연 속의 정자문화를 중심으로 우리

        나라의 가사문학을 발전시키는데 한 몫을 하였다는 점이다. 의례히 정자라하여 이름난 문인과객들이 이용하는 장소로만 이용된 것이

        아니고 학문을 논하고 시문학을 이야기하는 가운데 우리나라의 가사문학의 기틀이 마련되게 되었다는 점 크게 자랑할 일이다.

        오늘 돌아본 것을 안내자료 및 홍보자료를  중심으로 줄거리만 소개하고자 한다.



    <명옥헌원림(鳴玉軒苑林)>

          우리나라의 명승 제58로 2009년 9월 18일에 지정되었으며 전라남도 담양군 고서면 산덕리 511를 중심으로 지정면적 13,484㎡를

        차지하고 있다.
        담양 명옥헌(鳴玉軒)원림은 후산마을의 산기슭에 위치하고 있는데, 산기슭을 타고 내리는 계류를 이용하여 정자와 원림을 조성하고

        있다. 계류를 끌어들여 높은 지반에 조그만 위 연못(上池)을 조성하였으며, 이 연못의 옆에는 호남지방의 전형적인 구조를 갖는 정자인

        명옥헌이 위치하고 있다.


          조선 중기 명곡(明谷) 오희도(1583~1623)가 자연을 벗 삼아 살던 곳으로, 그의 아들 오이정이 선친의 뒤를 이어 이곳에 은둔하면서

        자연경관이 좋은 도장곡에 정자를 짓고, 앞뒤로 네모난 연못을 파서 주변에 소나무와 배롱나무 등을 심어 가꾼 정원이다.

         계곡물이 흘러 위 연못을 채우고 다시 그 물이 아래의 연못으로 흘러가는데, 물 흐르는 소리가 마치 옥구슬이 부딪치는 것만 같다

        하여, 연못 앞에 세워진 정자 이름을 ‘명옥헌(鳴玉軒)’이라 했다고 한다.


          명옥헌은 오희도의 손인 오대경이 중수했다고 하는 기록이 정철의 넷째 아들 정흥명이 지은「명옥헌기鳴玉軒記」에 전하고 있으며,

        계류가 바위에는 우암 송시열이 썼다고 하는 ‘명옥헌(鳴玉軒)계축(癸丑)’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명옥헌에 걸려 있는‘삼고三顧’라는

        편액은 유비가 제갈공명의 초가를 세 번이나 찾았듯이 인조가 반정 직전에 세상을 돌며 뜻을 함께 할 사람을 찾던 중 만난 선비가 오희도

        였으며, 인조가 오희도를 세 번 찾아 왔다는 뜻을 의미하는 글이다.

        주위의 산수경관이 연못에 비치는 모습을 명옥헌에서 내려다보며 경관을 즐길 수 있도록 조성하여 자연에 순응한 조상들의 지혜를 잘

        반영한 전통원림으로 자연경관이 뛰어난 명승지이다.


     <사진 1>  명옥헌 원림 주차장에 안내된 오방길.



     <사진 2>  후산리 마을 입구에 후산저수지가 있는데 이 곳에 나이가 300년 가까이된 느티나무가 서 있다. 보호수 명패를 달고.



     <사진 3>  보호수 모습.



     <사진 4>  후산저수지 둑에 역사를 자랑하는 왕버드나무들이 줄을 서 있다.



     <사진 5>  명옥헌 앞에 만들어진 연못이다. 가운데 섬이 하나 있고 둘레에는 나무들이 우거져 있다.



     <사진 6>  명옥헌 앞 연못 모습.



     <사진 7>  명옥헌 모습.



     <사진 8>  '명옥헌 계축'이라한 현판.



     <사진 9>  명옥헌 주변의 나무들도 이 정자의 내막을 알고 있을까?



     <사진 10>  명옥헌 윗 쪽의 연못이다. 계류의 물이 이 연못을 지나서 아래 쪽 연못으로 흘렀다 한다.



     <사진 11>  명옥헌 주변에 배롱나무들이 우거져 있다. 꽃이 피면 오랫 동안 붉은색 꽃이 아름답게 보였으리라.



     <사진 12>  이 나무는 매화나무다. 이 나무도 역사와 함께 하는 나무이니 이름을 '명옥매'라 불러주었더라면 하는 생각이 든다.



     <사진 13>  배롱나무도 변이에 의해서인지 잔 가지가 많은 빗자루 모습을 한 것이 있다.



     <사진 14>  명옥헌을 나서는데 길 옆에 하늘타리가 열매를 달고 겨울을 나고 있다. 이 열매는 약용으로 이용되는데?



     <사진 15>  명옥헌에 대한 안내문.



     <사진 16>  이 마을 어느 집 담장에 잘 자란 치자나무가 방문객을 반겨준다.





     <그림자가 쉬어가는 식영정 일원>

          식영정 일원은 전라남도 담양군에 있으며, 우리나라의 명승 제57호로 지정되었다. 

          식영정은 1560년(명종 15) 서하당 김성원(金成遠)이 자신의 스승이자 장인이었던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을 위해 지은 정자다.

        김성원이 쓴 시문집 《서하당유고(棲霞堂遺稿)》에는

        “공이 36세 되던 해인 1560년, 창평의 성산에 식영정과 서하당을 지었다(庚申公三十六歲 築棲霞堂于昌平之星山)”고 기록되어 있다.

        식영정은 정면 2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정자로 우뚝 솟아 있는 노송과 한여름 붉은 꽃의 무리로 온통 뒤덮인 배롱나무가 함께 어울려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다.


     <사진 17>  식영정 일원의 모습 - 부용당과 서하정이 보이는 아담한 구조.



          식영정은 부용당, 서하당과 함께 정자원림을 구성하고 있다.

        부용당과 서하당은 식영정 아래 낮은 계곡에 자리하고 있어 부용당 앞 연못의 가장자리에서 시작되는 돌계단을 올라야 언덕 끝에

        자리한 식영정을 만날 수 있다. 계단 주변으로는 소나무와 참나무들이 울창하고, 식영정 정면에서는 소나무 사이로 광주호의 수면이

        보인다.

          과거에는 배롱나무의 붉은 꽃이 온통 흐드러지게 핀 창계천의 여울이 아름답게 펼쳐졌을 것이다. 식영정 뒤편에는 '성산별곡 시비'가

        서 있고, 그 뒤로 소나무가 가득한 성산 봉우리로 산세가 연결된다.

        본래 정자의 ‘정(亭)’ 글자는 언덕 위에 집을 지어놓은 모습을 형상화한 것으로 전망이 탁 트인 곳에 위치한다는 관점에서 볼 때,

        식영정은 모범적인 정자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사진 18>  잘 자란 느티나무 사이로 보이는 부용당과 서하정 그리고 송강 정철 가사의 터 표지석.



          송강(松江) 정철(鄭澈, 1536~1593)은 식영정(息影亭)과 서하당(棲霞堂)이 있는 별뫼(星山)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와 밤하늘에 떠

        있는 별을 보며 아름다운 작품을 노래했다. 그래서 이 곳 일원을 '송강 정철 가사의 터'란 이름으로 알리고 있다.

        식영정은 담양의 창계천가 언덕 위에 지어진 정자로 조선 중기 호남가단의 한 맥을 이루는 식영정가단의 중심이 되었던 장소였다.

        정철은 이곳에서 가사와 단가, 한시 작품을 많이 남겼다.

        <성산별곡(星山別曲)은 정철이 김성원을 흠모하여 지은 가사로 국문학사에 길이 남는 빼어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이처럼 식영정은 송강문학의 산실로 우리나라 고전문학의 기틀이 마련된 곳이기도 하다.

        창계천 주변에는 식영정을 비롯하여 서하당, 부용당, 환벽당, 취가정 등 많은 정자가 있고, 이웃에는 별서정원으로 유명한 소쇄원이

        자리하고 있다.


     <사진 19>  '송강 정철 가사의 터' 임을 알리는 표지석과 부용당, 서하정..



          식영정의 주인이었던 임억령은 관직에서 물러난 뒤 노후를 이곳에서 유유자적하며 자연을 벗 삼아 생활했다.

        그는 세상의 부귀영화를 초개와 같이 여기고 산림에 묻혀 산 선비로 진퇴를 분명히 한 올곧은 지식인이었다.

        그는 호남의 '사종(詞宗)'으로 불리는데 '사종'이란 시문에 뛰어난 대가라는 의미다. 해남의 석천동에서 다섯 형제 중 삼남으로 태어난

        그는 14세 때 엄한 어머니의 뜻에 따라 청백리로 불렸던 조선 사림의 정통인 박상의 제자가 되었다. 임억령은 30세가 되던 해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갔다.

          그가 금산군수로 재직할 당시 을사사화(1545)가 일어났는데, 그의 동생 임백령이 사화에 연루된 것을 알고 벼슬을 내놓고 향리에

        은거했다. 그는 명종조에 다시 벼슬에 나아가 담양부사를 끝으로 은퇴한 후 이곳 식영정에서 은거했다.


     <사진 20>  서하정.



     <사진 21>  산자락의 식영정에서 바라본 아름다운 풍광.



     <사진 22>  송강 정철의 성산별곡 시비.



     <사진 23>  식영정 뒤의 산 능선으로 이어진 소나무 숲이 더욱 아름답게 보인다.



          경내에는 서하당과 석천을 주향으로 모셨던 성산사(星山祠)가 있었는데 그간 없어진 것을 최근 복원하였다 한다. 성산사 앞에는 나라

        사랑하는 선생의 뜻을 알리는듯 무궁화 한 그루가 잘 자라고 있다.


     <사진 24>  성산사 모습.



     <사진 25>  성산사 모습.



     <사진 26>  식영정에 대하여.



     <사진 27>  부용당의 모습.



     <사진 28>  서하당 모습.



     <사진 29>  앞 쪽에서 본 부용당 모습이다.



     <사진 30>  서하당 앞에서 자라는 대나무다. 왕대나 솜대는 아니고 죽순대 같이 보였다.



     <사진 31>  이 느티나무도 보호수 정도는 될 것 같은데?




    <광주 환벽당(環碧堂) 일원(一圓)>

          환벽당은 조선 명종(1540년 대) 때 사촌 김윤재(1501-1572)가 자연을 벗 삼아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건립한 남도 지방의 전형적인

        방이 있는 정자이다. 환벽당은 국가지정 우리나라 명승 제107호로 지정되어 있다.


     <사진 32>  경계가 어디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곳은 행정구역이 광주시에 해당된다.



     <사진 33>  환벽당에 대하여.



     <사진 34>  환벽당은 조선 명종 때 사촌 김윤재가 자연을 벗삼아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세운 남도 지방의 전형적인 방이 있는 정자라 한다.



     <사진 35>  환벽당 모습.



     <사진 36>  수선화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풀인 석산(石蒜)이 이렇게 겨울을 나고 봄에 잎이 없어지고 가을에 붉은 꽃을 피운다.



     <사진 37>  환벽당 건물의 모습.



     <사진 38>  취가정 가는 길 옆에 있는 나무가 평화스럽게 보인다.




    <취가정(醉歌亭)>

          취가정(醉歌亭)은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에 있으며 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제30호로 지정되어 있다.

        임진왜란 때 조선 의병의 총지휘관이었던 충장공 김덕령(忠壯公 金德齡, 1568-1596) 장군의 혼을 위로하고 충정을 기리고자

        후손들이 세운 정자이다.


     <사진 39>  취가정에 대하여.



     <사진 40>  취가정 모습.



     <사진 41>  취가정 모습.



     <사진 42>  취가정 앞 느티나무에서 자라는 마삭줄이 방문객을 반겨준다.



     <사진 43>  왕대나무의 마디 모습.



     <사진 44>  졸참나무와 마삭줄이 사이좋게 자라고 있다.



     <사진 45>  누구의 양묘장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대로 두니 아름다운 메타세콰이어 숲이 되었다.



     <사진 46>  '철쭉길'이라 이름한 곳에 이 나무가 자라고 있다. 한 그루라도 철쭉을 심었어야 했는데 생각할 문제다.





   ※  감사합니다. 더 깊이 있게 소개하지 못하였습니다. 더 연구하면서 고쳐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