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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울진 호월리에 있는 효자비를 찾아서.

죽림, 대숲, 사라미 2018. 6. 1. 12:16



           울진 호월리에 있는 효자비를 찾아서.


    1. 날 짜 : 2018년 5월 28일

    2. 동 행 : 가족탐방

    3. 이야기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에는 현풍곽씨십이정려각이 있는데 이는 여러 정려를 한 곳에 모아놓은 것이다.

        이러한 여러 사람들의 본보기가 되는 일들은 우리 나라 다른 고을에도 많은데, 대부분 충효에 대한 내용이 많다.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은 늘 지나다니는 길에 있는 내용들도 잘 살펴보지 않고 일상생활에 쫓겨 지나치는 일이 다반사다.

        경상북도 울진군 울진읍 호월리 마을의 들판 가운데에 효자비가 둘 서 있다. 이 효자비는 효자각 안에 보관되어 있지만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살펴볼 수 있게 되어 있다.

        그러나 이 분야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나 길을 가다가 길 옆에 있는 효자각을 들여다 볼 뿐 일반인들은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다.

        세월의 변함인가 크게 알리고 자랑해야 할 일들인데도 무심한 세월을 만나서 그런지 제대로 대접을 못받고 있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이 곳에도 조선 중기에 살았던 주경안(朱景顔)과 장서린(張瑞麟)의 효자비가 말없이 서 있다. 지금이 이러한데 앞으로 더 많은 세월이

        흐르면 어떻게 되겠는가?

        이 효자각 주변에는 지름이 30cm 정도 되는 무궁화나무 한 그루도 말없이 서 있다. 그리고 회화나무, 골담초 등도 자라고 있다. 누가 왜

        심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냥 이렇게 서 있으니 그대로 지내는 것이다.

        안내된 내용을 참고로 살펴보면 두 분 모두 나라에는 충신이요. 가정에서는 효자였던 주경안(朱景顔)과 장서린(張瑞麟)이다.

        「디지털울진문화대전」에 있는 내용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사진 1>  두 분의 효자각이 있는 모습이다. 앞은 장서린, 뒤는 주경안 효자각이다.



         주경안(朱景顔 )은
       조선 중기 경상북도 울진 출신의 충신이자 효자.
       본관은 신안(新安). 자는 여우(汝愚)이다. 아버지는 참봉(參奉) 주세홍(朱世弘)이고, 어머니는 곽씨이다.
       효성이 지극하고 나라에 충성스러워 문정왕후(文定王后), 인순왕후(仁順王后), 명종(明宗), 의인왕후(懿仁王后), 선조(宣祖)가 죽었을 때

       각각 3년 동안 상을 치르며 죽만 먹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에는 단을 쌓고 7년 동안 매일 국운이 회복되기를 기도하니 사람들이 이곳을 축천대(祝天臺)라 하였다.

       1965년 이곳에 유허비를 세웠다.


         아버지 주세홍이 1년이 넘도록 학질을 앓고 있을 때에 자기의 손가락을 끊어 피를 종이에 묻혀서 불에 태워 그 재를 술에 타서 먹여

       효험을 보았다. 또 아버지가 큰 종기를 앓자 토룡을 약으로 쓰려 했으나 엄동이었으므로 구할 수 없자, 향을 피우고 밤 새워 기도하여

       마침내 토룡을 얻어 즙을 내어 상처에 발라 병이 나았다.

       또 어머니가 같은 병을 앓자 아버지 때와 같은 방법으로 약을 써서 병이 나았다고 한다.

       한식이 되었으나 제물을 얻지 못하자 말총으로 올무를 만들어 언덕 숲에 매어 두었는데, 잠시후 비둘기 6마리가 걸려들어 이것을 제물로

       하였다고 한다. 부모가 죽자 죽만 먹고 각각 3년 동안 시묘를 살았다.
       주경안의 묘소는 경상북도 울진군 울진읍 정림2리 박곡에 있다.


       [상훈과 추모]
       1596년(선조 29) 강원감사 정구가 효행을 추천하여 정려(旌閭)되고, 1612년 울진군에 세운 향현사(鄕賢祠)에 남사고(南師古)와 함께

       배향되었다. 1748년(영조 24)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으로 증직되었다. 그 후 불천사(不遷祠)에 배향되었으며, 충효당(忠孝堂)을

       세우고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이 당기(堂記)를 지었다. 『삼강록(三綱錄)』에 효행이 기록되었으며, 울진군 울진읍 고성리에

       효자각이 있다. 시호는 충효당(忠孝堂)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을 참고하였습니다.


       <사진 2>  주경안의 효자각 현판.



       <사진 3>  주경안의 효자비.



       <사진 4>  주경안에 대하여.



       <사진 5>  잘 자란 무궁화 한 그루.



       <사진 6>  골담초와 왼쪽의 회화나무가 효자각을 지지킨다.




         장서린(張瑞麟 )

       조선 중기 경상북도 울진 출신의 효자.
       본관은 울진(蔚珍). 자는 성보(聖甫). 아버지는 흡곡훈도(歙谷訓導) 장응철(張應哲)이다.
       장서린은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어릴 때에 부친상을 당해 손색없이 상례를 다하고 3년 동안 죽을 먹었으며 홀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보살폈다. 외출하면 밤중이라도 꼭 집에 돌아왔고, 때로는 호랑이가 데려다 주는 기이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

       어머니의 병이 위급하자 자기의 손가락을 끊어 그 피를 어머니의 입에 넣어 다시 소생시켰다. 3년 후에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아버지

       상례 때와 같이 정성을 다하였다.


       [상훈과 추모]
       1633년(인조 11)에 정려(旌閭)를 세우라는 명이 내려졌다. 효자비는 경상북도 울진군 울진읍 고성리 373번지 청고동 앞 논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다. 비각은 자연석 기단과 초석 위에 단칸 규모로 지은 맞배 기와집이다.

       전면은 홍살이며, 3면은 판재로 막음하였다. 비는 얇은 판석형이며, 현재 비면의 기록은 알 수 없다. 현판에는

         “효자장임낭장서린지려(孝子將壬郎張瑞麟之閭) 인조십일년계유명정(仁祖十一年癸酉命旌) 금상이년경술십일월십일이건(今上二年庚戌

         十一月十日移建)”

       이라는 글귀가 씌어져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을 참고 하였습니다..


       <사진 7>  장서린의 효자각 현판인데 내용은

                     “효자장임낭장서린지려(孝子將壬郎張瑞麟之閭) 인조십일년계유명정(仁祖十一年癸酉命旌) 금상이년경술십일월십일이건(今上二年庚戌

                     十一月十日移建)” 이다.



       <사진 8>  장서린의 효자비.



       <사진 9>  장서린 효자비.



       <사진 10>  두 효자각 사이에서 자라고 있는 회화나무와 골담초.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