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를 찾아

43. '동무 생각'을 노래한 청라언덕은 아직도 푸르렀다.

죽림, 대숲, 사라미 2011. 7. 18. 11:06

 

     ‘동무생각’을 노래한 청라언덕은 아직도 푸르렀다.

 

        청라언덕은 푸를 청(靑), 담쟁이 라(蘿)해서 '푸른 담쟁이가 있는 언덕' 곧 '청라(靑蘿)언덕'이다. 
        학창시절 즐겨 불렀던 가곡 ‘동무생각’에 나오는 청라언덕이 대구에 있다. 지금의 동산의료원이 있는 뒤쪽 언덕 일대가 당시의

        청라언덕이다. 여기에는 대구에서 의료 및 선교활동을 했던 선교사들의 사택들이 모여 있는 언덕이기도 하다.
        가곡 ‘동무생각’을 작곡한 사람은 대구 태생의 박태준(1901~1986년) 선생이고 노래말은 이은상 선생이 지었다. 이 노래 속에 나오는 

        청라언덕은 박태준 선생이 계성학교를 다니던 시절 자주 마주쳤던 백합 같은 신명학교 여학생을 그리워했던 장소로 애틋한 마음을

        이은상 선생의 노래말을 받아 '동무 생각'이란 가곡으로 태어나게 한 곳이기도 하다.  

        이제 '동무생각'을 다시 읊어보면 아련한 추억이 깃든 학창시절로 돌아가는 듯한 느낌을 받곤 한다.

 

        1.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2. 더운 백사장에 밀려드는
            청라언덕 위에 백합 필적에                    저녁 조수 위에 흰 새 뛸 적에
            나는 흰나리 꽃 향내 맡으며                   나는 멀리 산천 바라보면서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청라언덕과 같은 내 맘에                       저녁 조수와 같은 내 맘에
            백합 같은 내 동무야                             흰 새 같은 내 동무야
            네가 내게서 피어날 적에                       네가 내게서 떠돌 때에는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3. 서릿 바람 부는 낙엽 동산 속                  4. 소리 없이 오는 눈발 사이로

                       꽃진 연당에서 금어 뛸 적에                       밤의 장안에서 가등 빛날 때

                       나는 깊이 물 속 굽어보면서                       나는 높이 성궁 쳐다보면서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꽃 진 연당과 같은 내 맘에                         밤의 장안과 같은 내 맘에

                       금어 같은 내 동무야                                 가등 같은 내 동무야

                       네가 내게서 뛰놀 때에는                           네가 내게서 빛날 때에는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지금 청라언덕에는 박태준 선생을 기리는 ‘동무 생각’ 노래비가 세워져 있다.

 

 

        청라언덕에 올라 기뻤던 일은 이 언덕에 아름드리 나무들이 많이 우거져 있다는 점이다. 덧붙여 더 기쁜 일은 숲을 이루는 나무들이

        모두 우리들의 생활 주변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정든 나무들이라는 점이었다. 선교사들이 선교활동을 하던 당시는 이 곳이 허허 벌판

        정도였으리라. 그러나 지금은  대구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다. 이 곳에 이렇게 우거진 숲이 있다는 것은 정말 자랑스런 일이다.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여려 차례의 크고 작은 공사가 많았을 것이지만 한 그루의 나무도 훼손하지 않고 그대로 보전하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뚜렷하고 지금도 큰 소나무를 이식하여 키우고 있다.
        참느릅나무, 아까시나무, 상수리나무, 용버드나무, 가죽나무, 말채나무, 라일락 등은 오래된 동산의료원이 개원할 당시의 나무들인것

        같았는데 참느릅나무와 상수리나무, 아까시나무는 여러 그루가 아름드리 굵었다. 

        이 언덕에서 본 나무와 유적들을 살펴 보기로 하자.

 

       <사진 1>  의료 선교 박물관이다. 선교사 스위즈 주택의 보수공사를 하고 있었다. 지붕의 기와를 내리는 것으로 보아 큰 보수공사인 것

                  같았다.

 

 

       <사진 2>  1899년 동산의료원 초대 원장인 존슨이 사과나무를 가져와 심은 72그루 중 유일하게 살아 남은 나무의 2세 나무다.

                  그러니까 대구사과나무의 시조격인 2세 사과나무다.

 

 

       <사진 3>  동산의료원 개원 당시 미국에서 들어온 한국 최초의 서양 사과나무라는 긍지를 갖고 있는 나무다.

 

 

       <사진 4>  사과나무를 살리고 보호하는데 많은 노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오랜 세월 동안 많은 풍상을 겪어 줄기가 상한 부분도 있다.

                  그렇지만 줄기를 보호하기 위하여 노력한 현재의 모습이다. 

 

 

       <사진 5>  사과나무를 보호하기 위하여 받침대를 두 겹으로 받쳤다. 줄기의 윗부분이 아랫부분 보다 더 굵은 곳도 보인다.

 

 

       <사진 6>  주택 옆에는 명자나무가 수세를 떨치며 자라고 있다.

 

 

       <사진 7>  동산의료원 전신의 정문과 중문의 기둥 모습이다. 그 위에 본원의 초창기 교회 종을 올려 놓았다. 전국 담장 허물기의 첫

                  행사로 철거한 본원의 정문과 중문의 기둥을 이 곳에 옮겨 놓은 것이다.

 

 

       <사진 8>  본원의 담장을 허물기 전 동산병원의 정문기둥과 중문기둥 위에 초창기 교회의 종을 올려 놓았다.

 

 

       <사진 9>  스위즈 선교사의 주택과 당시 사과나무 및 명자나무가 보인다. 그리고 울타리에는 무궁화가 탐스럽게 피었다.

 

 

       <사진 10>  무궁화가 활짝 피었다. 자라고 싶은대로 자라게 그냥 두었으면 한다.

 

 

       <사진 11>  정원에 대나무, 팽나무, 상수리나무가 자라고 있다.

 

 

       <사진 12>  스위즈 선교사 주택 뒤편의 담이다. 팽나무와 말채나무, 아까시나무가 자라고 있다.

 

 

       <사진 13>  챔니스 선교사의 주택이다. 말 그대로 '청라'다. 개원 당시에 교향에서 가져와 심었다는 담쟁이덩굴이다. 지금도 푸르게

                   잘 자라고 있다. 창문에는 문을 제외한 모든 부분에 뻗으면서 자라고 있다.

 

 

       <사진 14>  챔니스 선교사 주택 안내문

 

 

       <사진 15>  주택 벽에는 담쟁이덩굴이 자라고 정원에는 참느릅나무가 자라고 있다. 아름드리 굵은 나무다.

 

 

       <사진 16>  상수리나무라고 이름을 붙였다. 그러니 그렇게 믿을 수 밖에. 그런데 참 이상하다. 잎의 뒷면은 굴참나무. 앞면과 잎가,

                    그리고 잎자루는 틀림없는 상수리나무다. 자람이 싱싱하다.

 

 

       <사진 17>  아름드리 용버드나무다. 줄기가 꼬불꼬불한 버드나무다. 이렇게 굵은 용버드나무는 보기가 드물다.

 

 

       <사진 18>  참느릅나무, 상수리나무, 팽나무들이 숲을 이루었다.

 

 

       <사진 19>  큰 둥치의 줄기에서 숨은 가지가 나와 자란다. 참느릅나무다. 큰 나무는 비스듬히 자라고 있다.

 

 

       <사진 20>  상수리나무다. 싱싱하게 자란다. 상수리나무와 굴참나무의 교잡종인 것 같다.

 

 

       <사진 21>  주개원 당시의 라일락나무인 것 같다. 밑둥치 둘레가 1m 정도 되었다.

                    오랜 세월 동안 자라면서 모양이 이렇게 되었겠지만, 등치의 크기는 오래되었음을 말해준다.

                  

 

       <사진 22>  이 땅에서 선교와 인술을 베풀다 가신 분들이 묻힌 기념정원이다.

 

 

       <사진 23>  은헤정원의 모습

 

 

       <사진 24>  아까시나무를 비롯한 여러 나무들이 우거진 숲길

 

 

       <사진 25>  상수리나무가 싱싱하게 자라고 있다.

 

 

       <사진 26>  의료박물관 모습이다.

 

 

       <사진 27>  의료박물관 정원 모습

 

 

       <사진 28>  나무를 키우기 위한 노력 흔적이 곳곳에 나타나 있다.

 

 

       <사진 29>  대구동산병원 구관 중앙 입구 현관의 모습을 옮겨 놓은 곳이다.

 

 

       <사진 30>  대구동산병원 구관의 현관 모습이다. 산 역사의 산물로 훌륭하다. 당시의 현관 모습을 사진도 아닌 실물을 그대로 옮겨

                    놓았다는 자체가 기발한 아이디어다.

 

 

       <사진 31>  대구동산병원 현관에 전시된 개원 당시의 사진(1)

 

 

       <사진 32>  대구동산병원 현관에 전시된 개원 당시의 사진(2) - 중앙에 돌출된 현관이 <사진  30>이다.

 

 

       <사진 33>  대구동산병원 현관에 전시된 개원 당시의 사진(3)

 

 

       <사진 34>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된 동산병원 안내판

 

 

       <사진 35>  선교사 블레어의 주택에 대하여

 

 

       <사진 36>  선교사 블레어의 주택이다. 나무가 많이 우거져 있다. '교육·역사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3·1운동 기념관이기도 하다.

 

 

       <사진 37>  대구제일교회도 청라언덕에 자리하고 있다.

 

 

       <사진 38>  제일교회 옆으로 3·1운동로가 있고 이 길에 삼일운동계단이 있다. 일명 90계단이라고도 부른다. 이 계단을 중심으로 양쪽

                    벽에 대구의 역사를 말해주는 역사가 담긴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이 사진이 잘 보존될 수 있도록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던 귀중한 사진이다. 이 계단을 내려가면 길 건너 편에 계산대성당이 나타난다.

 

 

       <사진 39>  계단 벽에 게시된 사진(1) - 1908년 당시의 제일교회 건물 모습.

 

 

       <사진 40>  벽에 게시된 사진(2) - 고종황제 서거 무렵의 서울 대한문을 중심으로한 상황

 

 

       <사진 41>  벽에 게시된 사진(3) - 대구 최초 미국선교사 아담스가 사택으로 사용하던 건물과 이 건물의 지하실에서 계성고 학생들이

                     독립선언문을 등사하였다는 사진자료.       

 

 

       <사진 42>  벽에 게시된 사진(4) - 신명학교교사 및 학생들의 삼일운동

 

 

       <사진 43>  벽에 게시된 사진(5) - 서문시장은 천황당 못을 메운 자리에 만들어졌다.

 

 

       <사진 44>  벽에 게시된 사진(6) - 순종황제 국장일 기간에 상인들이 백립을 쓰고 있다.

 

 

       <사진 45>  벽에 게시된 사진(7) - 현재의 계성고등학교에서 본 당시의 서문시장 모습.

 

 

       <사진 46>  벽에 게시된 사진(8) - 당시의 대구보고와 삼일운동

 

 

       <사진 47>  벽에 게시된 사진(8) - 교남기독청년회와 삼일의거.

 

 

       <사진 48>  벽에 게시된 사진(9) - 계산성당과 그 일대의 모습

 

 

       <사진 49>  삼일운동계단을 내려서면 도로 건너에 계산대성당이 나타난다.

 

 

       <사진 50>  계산대성당 모습

 

 

       <사진 51>  계산대성당에서 계산오거리 쪽으로 50m 정도 걸으면 인도에 이상화 선생의 시귀를 적은 인도블럭길이 나타난다.

                    "빼앗기겠네' 시귀 끝 왼쪽 골목 안에 서상돈 선생과 이상화 선생의 고택이 있다.

 

 

       <사진 52>  골목입구 벽에 있는 벽화 - 시인 이상화 선생의 생전 모습

 

 

       <사진 53>  국채보상운동의 거장 서상돈 선생 고택에 들렀다.

 

 

     서상돈선생(1851~1913년). 
     1907년 일본에 진 빚을 갚아야 국권을 회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대구 광문사사장인 김광제와 함께 대구에서 국채보상회를 조직하고

     국민들에게 금주와 금연으로 돈을 모아 나라의 빚을 갚자는 '국채보상운동'을 벌였다. 
     이 운동은 전국적으로 파급되어 큰 파장을 일으켰다. 비록 일본의 방해로 뜻한바를 이루지는 못하였으나, 일제의 야욕을 물리치는 길은

     국민들이 깨우쳐야 하고 뭉쳐서 싸워 이겨야 함을 역설하고 실천에 옮긴 인물이다.

 

       <사진 54>  서상돈 선생 고택 모습    

 

 

 

     이상화 선생 고택에 들렀다.
     서상돈 선생 고택 맞은 편에 자리하고 있다. 유명한 시 한편을 낭송해 본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지금은 남의 땅-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 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 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 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 자욱도 섯지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넘어 아가씨 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 밤 자정이 넘어 나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털을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쁜하다.
                                             혼자라도 가쁘게 나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 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지지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 매던 그 들이라도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 다오.
                                             살찐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셈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닷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우서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 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서름이 어울어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로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명이 잡혔나보다.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사진 55>  이상화 선생 고택 모습

 

 

       <사진 56>  시비 '역천'

 

 

       <사진 57>  시비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사진 58>  이상화 선생에 대하여.

 

       <사진 59>  시계산오거리 큰 도로 쪽을 가다보면 '근대로의 여행'이란 안내판이 있다. 이 골목 안쪽에 서상돈 선생과 이상화 선생의

                    고택이 있다. '근대로의 여행'은 대구시에서 일고 있는 골목투어의 안내판이다.

 

 

       <사진 60>  여기서 청라언덕이 있는 박태준 선생의 '동무 생각'에 나오는 순결하다고 한 백합꽃을 소개하면서 청라언덕 내용을 마친다. 

 


 

 

 

   ※  감사합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