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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달성군 현풍면 현풍곽씨 십이정려각(玄風郭氏 十二旌閭閣)을 찾다.

죽림, 대숲, 사라미 2018. 1. 4. 19:15

 

           달성군 현풍면 현풍곽씨 십이정려각(玄風郭氏 十二旌閭閣)을 찾다.

 

    1. 날 짜 : 2017년 8월 26일 

    2. 동 행 : 나사회 회원.

    3. 이야기

          정려각이란 충신, 효자, 열녀 등을 기리고자 정문(旌門)을 세우고 표창하기 위해 건립한 상징적인 건물로 안에 정려비나 현판처럼

        만든 정려기(旌閭記)를 모신다. 이 건물은 1598년(선조 31) 부터 영조 때 까지 솔례마을 현풍곽씨 일문에 포상된 12정려를 한 곳에

        모은 정려각이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안음현감으로 황석산성에서 왜적과 싸우다가 가족과 함께 장렬히 순국한 존재(存齋) 곽준(郭逡)과 그 두 아들,

        그리고 딸이 일문삼강(一門三綱)으로 정려된 것과 임진왜란 때 비슬산 자락의 사효자굴에서 병든 아버지를 대신하여 목숨을 바친

        곽재훈의 네 아들인 결,청,형,호(潔,淸,泂,浩)가 사효자공(四孝子公)으로 정려된 것을 비롯하여 정려가 내릴 때 마다 따로 정려각을

        세우던 것을 영조 1년(1725) 이후 이들 정려를 현재의 자리에 모아 세웠다고 한다.

        현재 있는 곳은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면 지리 1348-2 이고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9호로 지정되어 있다. 

 

 

        6.25 때 건물 일부가 폭격으로 무너지고 비석 1기가 부서졌으나, 1963년에 모두 보수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삼강오룬(三綱五倫)을 지켜 모범이 되면 조정에서 이를 포상하고 정려하였는데, 한 문중에 12정려가 내려진 일은 매우

        드물고도 자랑할 만한 것이다.(안내문 첨고)

 

        한 가문에서 12명의 포상자가 나왔다는 것은 흔치 않은 일로 정려를 받게 된 사유를 자료와 함께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사진 1>  달성군 현풍면 솔례마을에 십이정려각이 있는데 '솔례'라는 이름에 담긴 내력은 다음과 같다. 조선시대 세조조에 청백리로

                      익산군수를 지낸 곽안방(郭安邦) 선생이 이 곳에 터를 잡으면서 후손들이 예절바른 사람이 되라는 가르침을 담고 마을 이름을

                  솔례(率禮)라 하였다 한다. 현재 이 곳은 행정구역상 지명이 '대리'이지만 이 곳 사람들은 '솔례'라는 이름을 더 선호한다고 한다.

 

 

 

       <사진 2>  마을 앞에 도로가에는 보호수로 지정된 느티나무와 회화나무가 한 그루씩 자라고 있다.

                  느티나무 - 나이가 400년이고 나무의 높이 17.5m, 둘레는 610cm이다. 달성군 현풍면 대리 603-7에 있으며 수세는 아주

                                 좋은 편이다(앞).

                  회화나무 - 나이가 150년, 나무의 높이는 15m, 둘레는 250cm로 역시 잘 자라고 있다. 있는 곳은 느티나무 바로 옆에서 나란히

                                 자라고 있다(뒤). 

 

 

 

 

       <사진 3>  마을 앞 주변 모습.

 

 

 

 

       <사진 4>  문화재자료 안내석.

 

 

 

       <사진 5>  한 문중의 문훈석(門訓石)이다. 내용인즉 '충효를 대대로 가업으로 삼고 청렴결백을 가문의 명성으로 삼으라'는 문훈비다.

 

 

 

 

       <사진 6>  십이정려각 모습.

 

 

 

 

       <사진 7>  임금과 신하의 도리, 부모와 자식의 도리, 남편과 아내의 도리를 삼강이라 하는데 가운데 문이 '삼강문'이다.

 

 

 

 

 

       <사진 8>  일문삼강.

                   임진왜란 때 안음현감 곽준이 황석산성에서 두 아들 곽이상, 곽이후와 함께 전사하자 그의 며느리와 출가한 딸도 남편을 따라

                자결하였기에 선조 임금이 정려했다. 곽준의 딸은 류문호와 결혼했는데, 남편이 일본군에게 사로잡히자 이미 성 밖에 나와 있던

               그 딸도 그 소식을 듣고 목메어 자결했다(5인).

 

 

 

 

       <사진 9>  충신 - 안음현감 충렬공 곽준 지려.

 

 

 

 

       <사진 10>  효자 - 곽이상, 곽이후 지려.

 

 

 

 

       <사진 11>  열부 - 곽이상 처 거창신씨 지려.

 

 

 

 

       <사진 12>  열부 - 곽준의 사위 류문상의 처 포산곽씨 지려.

 

 

 

 

       <사진 13>  사효자각.

                  곽재훈(郭再勳)의 아들 4형제가 임진왜란 때 비슬산 자락의 사효자굴에서 병환 중에 있는 아버지를 일본군으로부터 죽음으로

                  지켜드렸기에 선조 임금이 정려했다. 곽결, 곽청, 곽형, 곽호 4형제가 효자사공(孝子四公)으로 정려되었다(4인).

 

 

 

 

       <사진 14>  효자 - 곽결, 곽호, 곽청 지려.

 

 

 

 

       <사진 15>  양효자려.

                  곽수의 두 아들 의창과 유창은 어릴적 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는데, 부모가 죽자 식음을 전폐하는 등 효성이 마을 사람들을 감동

                  시켰다. 조정에서는 두 아들을 정원 별검으로 증직시키고 정려.

 

 

 

 

       <사진 16>  효자 - 별검 곽의창, 곽유창 지려.

 

 

 

 

       <사진 17>  곽재기(郭再祺)의 부인 광주 이씨(廣州李氏)는 임진왜란 때 일본군에 쫓기게 되자 순결을 지키기 위해 물에 투신, 자결했기에

                   선조 임금이 정려했다(1인).

 

 

 

 

       <사진 18>  열부 - 곽홍원(郭弘垣)의 부인 밀양 박씨는 강도가 들어와 남편을 해치려 하자 죽음으로써 남편을 보호하였기에 현종 임금이

                   정려했다(1인).

 

 

 

 

       <사진 19>  열부 - 곽수형의 부인 안동 권씨는 결혼 후 1년이 채 되지 않은 시점에서 남편이 지병으로 위독하게 되자 자신이 대신 죽기를 원

                   했으나, 남편이 사망하자 식음을 전폐하고 따라 죽었다. 현종 임금이 정려했다(1인).

 

 

 

 

       <사진 20>  열부 - 곽내용의 부인 전의이씨는 이명후의 딸로 남편이 일찍 죽자 시부모 때문에 자결하지 못하고 시부모님을 극진히 모신후

                   시부모가 죽자 남편을 따라 식음을 전폐하고 자신도 죽음.

 

 

 

 

       <사진 21>  십이정려각의 안 모습.

 

 

 

 

       <사진 22>  조선국효자처사곽공지비.

 

 

 

 

       <사진 23>  효자처사포산곽공지비.

 

 

 

 

       <사진 24>  비의 몸신 부분이 없어 내용을 알수 있는 비의 부분.

 

 

 

 

       <사진 25>  생열귀나무로 보이는 나무가 종택에서 자라고 있다.

 

 

 

 

 

 

 

    ※  감사합니다. 안내문과 알려진 내용들을 중심으로 소개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