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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 운조루(雲鳥樓)와 곡전재(穀田齋)는 오미(五美)마을에 있다

죽림, 대숲, 사라미 2018. 9. 10. 08:46



           <운조루(雲鳥樓)와 곡전재(穀田齋)는 오미(五美)마을에 있다>


   1. 날 짜 : 2018년 9월 3일

   2. 동 행 : 가족방문

   3. 이야기

         2018년 9월 3일 비를 맞으며 전라남도 구례군 산동면에 있는 지리산가족호텔에  가면서 토지면 오미리에 있는 운조루(雲鳥樓)와

       곡전재(穀田齋)에 들렀다. 이 곳에 도착한 후에도 비는 계속 내린다. 비오는 날 찾은 객이 그렇게 반갑지는 않았을 터, 관리하는 사람이

       그리 달갑게 맞지 않는다. 어느 문화재인들 관리인은 그리 반갑지 않을 것이라 생각은 했었지만 비 오는 날의 찾음은 더욱 그러리라

       생각되었다. 

        화엄사와 사성암은 작년에 돌아보았으니 올해는 좀 더 다른 곳을 찾은 것이 비오는 날의 운조루(雲鳥樓)와 곡전재(穀田齋)가 된 셈이다.

       두 문화재가 모두 오미마을에 이웃하여 자리잡고 있다. 까닭은 조상들의 풍수지리설에 따른 명당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어서었다.

       명당이 오미리(五美里)여서 모두 오미리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 마을 모두는 명당에 자리하고 있다는 결과가 되는데

       이야기인즉 잎뒤좌우의 주변 환경이 금환락지(金環落地)형에 해당하는 당시 우리 나라의 3대 명당에 해당되는 곳이라 한다. 

       오미마을에 대한 안내된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오미마을은
        영조 52년(1776)에 문화류씨 류이주(柳爾冑)가 풍수지리설에 의한 금환락지(金環落地)에 운조루(雲鳥樓)를 지으면서 마을이 형성되

       었으며, 그 전에는 오동이라 불렀다. 오동은 내죽, 하죽, 백동, 주동, 환동을 말한다. 마을의 안산이 되는 오봉산이 기묘하고 사방으로

       둘러싼 산들이 길하며 물과 샘이 족하고 풍토가 모두 질박하며 터와 집들이 살아가기에 좋다하며 오미리(五美里)라 불리고 있다.

       오미마을에 운조루와 곡전재가 자리하고 있다(안내문에서).


       금환락지(金環落地)는 
        '금가락지가 떨어진 터'라는 뜻으로, 풍수지리설에 근거를 둔 명당(明堂). 
       풍수지리에서 - 금귀몰니(金龜沒泥 - 금거북이 진흙 속에 묻힌 터)·

                           오보교취(五寶交聚 - 금,·은,·진주, 산호, 호박 등 5가지 보물이 쌓인 터).

                           금환락지(金環落地 - 선녀가 지상으로 내려와 목욕을 한 뒤 다시 하늘로 오르다가 금가락지를 떨어뜨린 곳) 등이 당시에

        말하는 3대 명당으로 전한다. 


       <운조루(雲鳥樓)에 대하여>
              국가민속문화재 제8호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 103
        이 집은 조선 영조 52년(1776)에 당시 삼수부사를 지낸 류이주(柳爾冑)가 세운 것으로, 조선시대 양반가의 대표적인 구조의 집이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이 집터는 남한 3대 길지(지덕(地德)이 있는 좋은 집터)의 하나로 금환락지(金環落地)의 형세와 국면을 이루고

       있다고 한다. 집은 一자형 하인들의 방(행랑채)와 T자형 사랑채, ㄷ자형 안채가 있고 대문 안의 행랑채가 서로 연이어져 있으며,, 안채의

       뒤편에는 사당이 자리잡고 있다. 
       구조 양식은 기둥과 기둥 위에 건너 얹어 그 위에 서까래를 놓는 나무인 ‘도리’와 그 도리를 받치고 있는 모진 나무인 ‘장여’로만 된

       구조(민도리집)로서, 지붕은 사랑채, 안채가 연이어져 있으나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사진 1>  오미리에 도착하였을 당시 비는 계속 내리고, 사진은 전시관. .



       <사진 2>  유물전시관 주차장.



       <사진 3>  운조루 입구다. 전통양식의 연못이 방문객을  맞는다.



       <사진 4>  연못의 모양.



       <사진 5>  건물의 짜임.



       <사진 6>  안에서 밖으로 본 솟을대문과 행랑채 모습. 대문 옆에 붙은 방이 관리인의 집.



       <사진 7>  마당에 위성류나무가 자라고 있다.



       <사진 8>  위성류나무가 옆으로 길게 자라고 있다.



       <사진 9>  마당에 크게 자란 나무들은 보이지 않았으나 키가 작은 오래된 나무들은 보였다. 사진은 동백나무.



       <사진 10>  회양목의 키는 작으나 밑등치의 둘레는 62.8cm 였다.



       <사진 11>  건물의 짜임.


 

       <운조루(雲鳥樓)>
       평면구조를 살펴보면 사랑방 서쪽에 대청 2간이 있는데 이것이 “운조루”다. 운조루는 일종의 택호에 해당하는데, “구름 위를 나는 새가

       사는 빼어난 집”이란 뜻이다.

       운조루는 도연명의 귀거래사라는 칠언율시의 머리글자만 따온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운조루는 이 마루를 말한다. 그런데 이제는 이 건물 전체를 말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사진 12>  마루의 모습.



       <사진 13>  건물의 모습.



       <사진 14>  건물의 모습.



       <사진 15>  건물의 모습.



       <사진 16>  건물의 모습.



       <사진 17>  건물의 모습. 나무수레 바퀴도 보인다.



       <사진 18>  건물의 모습.



       <사진 19>  집안에 키가 크게 자란 진달래도 자라고 있다.



       <사진 20>  집안에 무궁화도 자라고.



       <사진 21>  금목서와 뜰보리수나무.



       <사진 22>  타인능해(他人能解)
         “타인능해(他人能解)”란 쌀 두 가마니 반이 들어가는 나무독에 쌀을 채워놓고 마을에 가난한 사람이 끼니를 이을 수 없을 때 마개를 돌려

       쌀을 빼다가 밥을 짓도록 혀용한다는 뜻으로 쌀독의 마개에 “타인능해(他人能解)”라고 써 놓았었다.

       각종 민란, 동학란, 여순사건, 6.25전쟁 등 힘든 역사의 시간을 지내오면서도 운조루(雲鳥樓)가 지금처럼 건재할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바로 이 “타인능해(他人能解)”의 정신 때문일 것으로 생각된다.

      


       <사진 23>  안채 마당에는 우물과 음식을 조리하는데 필요한 도구들이 있다.



       <사진 24>  다락에서 밖을 볼 수 있게 설계하였다.



       <사진 25>  사당이 자리하고 있는 안쪽.



       <사진 26>  건물의 설계.



       <사진 27>  양반댁이라서 그런지 옥매나무가 여러 그루 보인다.



       <사진 28>  사당 앞에는 치자나무가 자라고.



       <사진 29>  사당 앞에도 2m 가 넘는 진달래가 자라고 있다.



       <사진 30>  살림이 어려운 사람들을 배려한 차원에서 굴뚝은 낮게해서 연기가 보이지 않게 하였다.



       <사진 31>  모든 굴뚝이 이렇게 낮다.



       <사진 32>  안마당엔 장독대와 우물.



       <사진 33>  빈 공간을 이렇게 사용하였으리라.



       <사진 34>  밖에서 본 솟을대문과 행랑채 모습.



       <사진 35>  대문 밖 좌우에 잡귀의 범람을 막기위해 말뼈와 호랑이 뼈를 달아서 방제하였다.



       <사진 36>  담장은 그리 높지 않게 하였다.



       <사진 37>  밖에서 본 담장의 모습.



       <사진 38>  정면의 밖 담장 모습.



       <사진 39>  앞에서 본 운조루의 뒤쪽 환경.



       <사진 40>  앞쪽에는 지리산이 둘러있다.





       <곡전재(穀田齋)에 대하여>

           ●  구례군 향토문화유산 제9호  

           ●  전남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 476-3 
        이 집은 1910년경 부터 승주 황전면에 사는 7천석의 부호 박승림이란 분이 明堂을 찾기 위해 십여 년을 많은 지관과 함께 수색 끝에

       토지면 오미리 환동(環洞)이 '금환락지'라고 확정짓고 이교신(李敎臣, 호 穀田, 병주의 曾祖父)씨와 함께 건축하게 되었다.
       그후 박승림은가 사업상 서울에 거주하고 집은 이교신(李敎臣)씨가 위탁을 받고 있었는데 박승림씨가 죽음으로 그의 자부(子婦)가 

       이교신(李敎臣)씨에게 인도하여 현재 5代째 살고 있다.   
       원래는 6채 53칸 한옥으로 지어졌으나 중년에 인수 당시 동행랑과 중간채를 팔아 훼손되었었는데, 현재 소유주 이순백씨가 1998년1월

       새로 동행랑과 중간 사랑채를 복원하고 누각을 신설하여  "춘해루"라 이름 지었으며(5채 51칸 연못(洗淵:세연)을 확장하였다(참고한 글).


       <사진 41>  곡전재는 조선후기 전통한옥이다.



       <사진 42>  KBS 전통한옥 아름다운 정원에 방영되었다.



       <사진 43>  곡전재 주변에 논밭이 있다.




       <사진 44>  곡전재 주변.



       <사진 45>  높은 담과 나무들로 둘러싸여 있다. 사진은 탱자가 익어가고 있는 모습.



       <사진 46>  솟을대문과 행랑채 모습.



       <사진 47>  곡전재에 대한 안내.



       <사진 48>  중랑채를 들어서는 길 좌우에는 골동품을 무인판매하고 있다. 앞의 운조루에 입장료가 1,000원 있으나 곡전재에는 입장료가

                  없이 운영되고 있다. 참으로 칭찬할 일이다. 이는 지자체나 국가에서 해결할 큰 문제거리로 생각된다.



       <사진 49>  집안의 모습.



       <사진 50>  동백나무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달고 있다.



       <사진 51>  집안의모습.



       <사진 52>  무인판매를 하고 있는 곳 - 옛날에 사용하던 생활용품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사진 53>  안채의 모습 - 현재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사진 54>  장독대 모습.



       <사진 55>  집안 모습.



       <사진 56>  무인판매를 하고 있는 모습.



       <사진 57>  마루 모습.



       <사진 58>  연못 모습.



       <사진 59>  집안 모습.



       <사진 60>  건축 모습.



       <사진 61>  건물이 一자로 배치되었다.



       <사진 62>  건물 모습.



       <사진 63>  가볍게 산책도 할 수 있게 구성되었다.



       <사진 64>  산책길은 대나무 밭길이다.



       <사진 65>  산책길은 집안으로 이어진다.




       <사진 66>  환락지, 곡전재, 춘해루 - 자생차로 방문객들이 이용할 수 있는 자가찻집도 있다. 정돈은 깔끔하게 잘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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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67>  곡전재는 운조루와는 다르게 담장이 매우 높다.




   ※  감사합니다. 부족한 내용은 더 보완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러한 건축물들은 대부분 생활하는 공간으로 이용되기 때문에 자세히 살피기가 어려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