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를 찾아

287. 자양면 성곡리 산 78 일대에서.

죽림, 대숲, 사라미 2018. 12. 3. 20:13


           자양면 성곡리 산 78 일대에서.


    1. 찾은 날짜 : 2018년 11월 24일

    2. 동 행 : 나미회 회원

    3. 이야기

          영천시 자양면 성곡리 기룡산 자락의 오천정씨 문중묘역인 하절과 백학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이라는 임고면 선원마을, 그리고 매화가

        가지를 드리운 모습을 간직한 임고면 삼매리 매곡마을 매산종택 등을 영천의 3대길지로 꼽는다. 그러니까 영천의 3대 명당은 모두 오천정

        씨 문중에서 소유하고 있는셈이 되는데 길지인 문중묘역 송림이 너무 아름답고 자랑스러워 소개하고자 한다. 
        자양면 소재지 조금 못 미친 곳에 자리 잡은 오천정씨 문중묘역은 음택(陰宅) 자리 중 으뜸으로 손꼽히는 곳이다. 정효자가 얻은 명당이라

        는 하절에는 울창한 노송들이 둘레 약 2㎞나 되는 큰 원을 그리며 우거져 있고 이 속에 99기의 큰 무덤들이 잠들어 있다. 묘역의 넓이도

        매우 넓고 그 둘레를 소나무를 비롯한 크고 작은 나무들이 위용을 자랑하며 자라고 있다.

        이 묘역의 제일 위쪽에는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서 왜군을 물리친 영천 의병대장 호수공이 있고, 그 아래에 아들 의빈과 그리고 빗겨서

        조금 아래에 충노 억수의 묘가 있다. 모든 조상들이 이름난 분들이지만 이 세 무덤이 사람들의 관심을 많이 끌고 있다. 그 까닭은

        정의번은 임진왜란 때 영천성을 수복한 후 경주성 탈환을 위해 호수공을 따라 출전했다가 호수공이 적에게 포위되어 위험에 처하자 세

        차례나 아버지를 구출하기 위해 적의 포위망을 뚫었고 아버지는 위험을 벗어났다. 아버지의 무사함을 알지 못한 의빈다시 적진으로

        들어가면서 종 억수에게

         “나는 아버지를 따라 죽음이 당연하지만 너는 죽을 까닭이 없지 않느냐? 내 곁을 떠나거라.”

        고 말했으나 억수는 말고삐를 잡고 눈물을 흘리며 “군신과 부자와 노주는 일체라 주인이 아버지를 위하여 죽기를 결심하셨는데 종이 어찌

        혼자 살겠습니까?”라며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함께 적진에 쳐들어가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

        호수공이 사후에 정의번이 평소 입던 옷과 갓으로 경주 싸움터에 가서 초혼해 와서 빈소를 지어 통곡하고 당시에 서로 마음을 통하던 지우

        들에게 애사(哀詞)를 구해서 관에 넣고 시체 대신 장사를 지내니 시총(詩塚)의 유래가 되었다.

        정의번 묘소 앞의 ‘충노억수지묘(忠奴億壽之墓)’라고 적힌 억수의 무덤은 주인의 무덤에 비해 비록 작고 초라하지만 정씨 집안에서 4백여

        년간 묘사 때마다 그의 충복됨을 잊지 않고 제수를 차려 그의 넋을 달래주고 있다(이상 참고문에서). 
        이 묘역의 송림과 숲은 2008년 10월 12일 부터 2년간 야생동식물 보호 및 번식을 위해 보호구역으로 지정하고 있다.


       <사진 1>  오천정씨 문중묘역의 소나무숲은 보는 이로 하여금 탐이날 정도로 잘 보전되고 잘 자랐다.



       <사진 2>  둘레의 소나무숲이 주는 솔향기도 그윽하다.



       <사진 3>  나무들이 이렇게 자유스럽게 잘 자라고 있다.



       <사진 4>  아랫쪽에서 본 오천정씨 문중묘역의 모습이다.



       <사진 5>  호수공을 중심으로 본 묘역의 모습 - 이 무덤 아랬쪽에 아들 의빈과 충노 억수의 묘가 있다. 묘역 전체가 좌청룡 우백호 및

                  배산임수의 풍수지리설에 잘 어울린다.



       <사진 6>  감태나무의 잎은 이렇게 말라서 내년 붐 까지 나무에 달려있다.



       <사진 7>  오천정씨 문중묘역을 돌아보고 삼휴당 잎에 섰다. 



       <사진 8>  사의당(四宜堂)은  
                  경상북도 영천시 자양면 성곡리 산78에 있으며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74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건물은 조선 영조 2년(1726)에 정중호(鄭重鎬), 중기(重岐), 중범(重範), 중락(重洛) 4형제의 우의를 돈독히 하고 유능한 인재

                 를 양성하기 위하여 삼귀리에 건립하였는데, 건물이 쇠락하여 순조 2년(1802) 자양면 용산리에 옮겨 지었다가 영천댐 건설로

                 1977년 3월 현재의 장소로 이전·복원 하였다.



       <사진 9>  사의당 앞에서 자라고 있는 참죽나무 한 그루 - 꽃을 피우고 열매를 달고 있다. 삼척 천은사 경내에도 높이가 100m 정도 되는 참죽

                  나무 네 그루가 곧게 잘 자라고 있다.



       <사진 10>  열매를 달고 있는 참죽나무.



       <사진 11>  사의정 모습.



       <사진 12>  삼휴정(三休亭)
                    이 건물은 경상북도 영천시 자양면 성곡리 산78에 있으며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75호로 지정되었다.

                  삼휴 정호신(鄭好信, 1605-1649)이 학문을 연구하기 위하여 조선 인조13년(1635)에 건립하였다고 한다.

                  정호신의 자는 덕기(德基), 호는 삼휴(三休), 본관은 오천(烏川)으로 17세때 아버지를 여의었으나 형 섬기기를 부모처럼 하고

                  스승을 예우함이 모범되었다고 한다. 조부인 호수 정세아가 살았던 곳에 정자를 짓고 그 풍경을 바라보면서 ‘삼휴(三休)’란 시를

                  지었는데 이로 인해 삼휴당이란 당호가 생기게 되었다. 삼휴당은 소박한 구조의 건물로 전면에만 난간을 시설하였는데 영천댐

                  건설공사로 1977년 3월 현 위치로 옮겨 복원하였다.



       <사진 13>  삼휴정 전경,



       <사진 14>  모두 마루난간을 설치하였다.



       <사진 15>  가운데는 대청마루고 양쪽으로 방을 두었다.



       <사진 16>  가옥의 구조가 특징이 있다.



       <사진 17>  삼휴고택(三休古宅)



       <사진 18>  삼휴고택도 가운데는 대청마루 그 양쪽으로 방을 두었다.



       <사진 19>  하천재 모습.



       <사진 20>  하천재(夏泉齋 - 附 碑閣)에 대하여.



       <사진 21>  하천재 모습.



       <사진 22>  하천재 비각



       <사진 23>  강호정(江湖亭)
                    이 건물은 경상북도 영천시 자양면 성곡리 산78에 있으며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71호로 지정되었다.

                  임진왜란 때의 의병대장 정세아가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를 양성하기 위해 세운 누각이다.

                  선조 32년(1599)에 지은 후 여러 차례의 보수공사가 있었는데, 지금의 건물은 영천댐 건설공사로 인해 1977년에 현 위치로 옮겨

                  다시 지은 것이다.

                  정세아는 임진왜란 당시 영천·경주지방을 되찾는데 큰 공을 세웠으며, 전쟁이 끝난 뒤 국가에서 수여하는 모든 영예를 사양하고,

                  고향인 용산동에 이 정자를 지어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를 가르치는 일에 힘을 기울였다고 한다.      



       <사진 24>  강호정 제일 위쪽 건물.



       <사진 25>  강호정에 심은 한 그루의 향나무.



       <사진 26>  강호정에 서면 앞으로 강이 흐르는데 경치는 절경이다.



       <사진 20>  아랫건물과 윗건물 사이의 문으로 중간 출입문이다.







   ※  감사합니다. 성곡리의 나무와 건물들을 소개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