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 의암(義巖)에서 의녀(義女) 논개(論介)를 보다.
1. 날짜 : 2021년 12월 29일
2. 동행 : 가족탐방
3. 이야기
지금 까지 말로만 들었던 진주성을 찾았다.
아침 10시 20분 집을 출발 중부내륙고속도로를 달려 11시 50분 진주성 공북문(拱北門) 앞 주차장에 도착하였다. 시기가 시기인지라 공북문 들어가는 입구에도 코로나 확인 절차를 마치고 들어갔다.
진주성안에 들어서자 김시민 장군 동상이 방문객을 반긴다. 밖에서 보기 보다는 상상외로 넓은 별천지가 펼쳐진다. 왼쪽으로 가면 진주성 우물과 촉석루가 있고 오른쪽으로 가면 박물관을 비롯한 또 다른 시설들이 있다.
정면에는 훤하게 트인 남강이 반겨준다.
촉석루를 찾았다.
촉석루는 고려 고종 28년(1241) 진주목사 김지대(청도김씨 시조) 선생이 창건한후 여러 차례 고쳤다. 촉석루라는 이름은 강 가운데에 우뚝 솟은 돌이 있어 이름을 촉석루라 하였다 한다.
촉석루는 진주성의 남장대로 장원루라 부르기도 했다한다. 촉석루는 전시에는 진주성을 지키는 지휘본부였고 평화로울 때에는 시인묵객들이 풍류를 즐기는 장소나 과거를 치르는 과거장으로 이용되었다. 촉석루는 1950년 한국전쟁 전 까지는 국보 제276호로 지정됐지만 전쟁 때 불에 탄 것을 진주 시민들이 진주고적보존회를 만들어 국비, 도비, 시비와 시민들의 성금으로 1960년 옛 모습을 찾게 되었다하니 자랑스런 진주라는 생각이 들었다.
촉석루 가는 길에는 옛 진주성과 촉석루에 대한 옛 사진들도 살필수 있게 전시되고 있었다. 촉석루에는 진주성을 지키던 군사시설임을 알리는 옛 장수기를 뜻하는 '수(帥)'자가 새겨진 장수기가 게양되어 있다.
문을 들어서면 촉석루(矗石樓)가 눈앞에 나타나고 의기사(義妓祠)와 의암(義巖) 까지 안내되어 있다.
촉석루는 지금 까지 많이 들어서 명승지로 알고 있었지만 의기사는 처음이라 내용을 몰랐다. 그런데 의기(義妓)라는 말이 별로 마음에 들지않는다. 하기야 조선시대였으니 기생(妓生)이 사람다운 대접을 받았을리 있었을까마는 그래도 논개는 차원이 다른 여인이 아닌가?
주논개(朱論介)는 조선 선조 때 전라도 장수현 임내면 대곡리 주촌마을 출생으로 1571년 선비 주달문(朱達文)과 부인 밀양 박씨 사이에서 태어난 반가(班家, 양반의 집안)의 여식이었다.
부친 주달문은 진사(進士)로 일찌기 슬하에 아들 주대룡을 두었으나 15세에 괴질로 요절하였고 이후 40세가 넘은 나이에 딸 논개를 보았다. 그러니 논개는 성은 주(朱) 이름은 논개(論介)다. 원래가 기생이 아닌 양반가의 여식이다. 그런 논개가 기구한 운명을 타고난 탓인지 삶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도움을 받았던 장수현감 충의공 최경회(崔慶會)의 후처가 되었고 진주성 싸움에서 남편을 잃었다. 그 한을 풀기위해 궁여지책으로 기생으로 가장하게 되었고 결과 왜장을 안고 남강에 뛰어들어 남편과 나라의 한을 풀었던 것이다. 그러니 의기(義妓)가 아니라 충절의녀(忠節義女)라 함이 바른표현이 아닐까 싶다.
나라를 걱정하고 애국함에 남녀노소가 어디있으며 양반과 천민이 어디있으랴.
이러한 마음으로 촉석루와 의기사 그리고 의암을 살피고 돌아왔다.
의암 곁에서 자라는 참느릅나무와 팽나무가 오늘따라 더 거룩하게 보이는 까닭은 어인 일이고?
오늘 본 내용을 간단히 올려본다.
<들어가기 전 진주성에 대하여 알아보자.>
진주성(晉州城)은
진주시 남성동, 본성동에 걸쳐있으며 사적 제118호로 지정되어 있다.
진주성은 외적을 막기 위하여 삼국시대부터 조성한 성으로 진주의 역사와 문화가 깃든 유서깊은 곳이다. 고려말 우왕 5년(1379)에 진주 목사 김중광이 왜구의 잦은 침범에 대비하여 본래 토성(土城)이던 것을 석성(石城)으로 고쳐 쌓았으며 임진왜란 직후에는 성의 중앙에 남북으로 내성을 쌓았다. 선조 25년(1592) 10월 왜군 2만 여명이 침략해오자 김시민 장군이 이끄는 3,800여 명의 군사와 성민이 힘을 합쳐 물리쳤으니 이것이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진주대첩이다. 이듬해 6월에는 왜군 10만여 명이 다시 침략했고, 민간인과 관료, 군인 등 7만여 명이 이에 맞서 싸우다 모두 순절하는 비운을 겪기도 하였다.
1972년에는 촉석문을 복원하였고, 1975년에는 일제 강점기에 허물어젔던 서쪽 외성의 일부와 내성의 성곽을 복원하였다.
1979년 부터는 성안팎의 민가를 모두 철거하는 등 진주성 정화사업을 시작하여 2002년에 공북문 복원공사를 마지막으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성곽의 둘레는 1,760m, 높이는 5-8m로 성 안에는 촉석루, 의기사, 영남포정사, 북장대, 창렬사, 호국사, 서장대, 임진대첩계사순의단, 국립진주박물관 등이 있다.
<사진 1> 진주성의 정문격인 공북문(拱北門)이다. 시각이 맞지 않아서 문 안쪽을 보았다.
<사진 2> 충무공 김시민 장군의 동상이 반갑게 맞아준다.
<사진 3> 충무공 김시민 장군에 대하여.
<사진 4> 성 안에서 자라는 가시나무와 팽나무.
<사진 5> 진주성 안의 우물인데 옛 부터 있었던 우물로 보인다.
<사진 6> 쌍충각(雙忠閣) 모습.
<사진 7> 쌍충사적비
<사진 8> 쌍충각을 가까이서 본 모습.
<사진 9> 쌍충각에서 본 남강.
<사진 10> 길에서 본 촉석루 모습.
<사진 11> 길쪽 현판 - 영조 때 명필 송하 조윤형(1725-1799) 선생이 썻다함.
<사진 12> 진주성의 옛 모습을 전시하고 있다.
<사진 13> 안내봉이다. 촉석루 방향으로 탐방을 하기로 하였다.
<사진 14> 촉석루의 시설 배치.
<사진 15> 옆으로 본 촉석루 모습.
<사진 16> 촉석루에서 본 남강 - 앞에 보이는 나무는 복사나무와 참느릅나무.
<사진 17> 군영의 장수기가 게양되어 있다.
<사진 18> 월계수나무다. 이 곳에 월계수나무를 심은 까닭은 무엇인가? 이 나무의 원산지는 남부유렵이
라 하는데.
<사진 19> 월계수나무가 한 그루 자라고 있다. 어떤 내용이 있는 나무로 보이는데?
<사진 20> 강쪽의 촉석루 현판 - 유당 정현복(1909-1973) 선생이 씀.
<사진 21> 2충 누각 까지 올라가 보았다. 누구나 신을 벗고 올라가라고 했는데 옛날에도 신을 벗었는지
궁금하다.
<사진 22> 남장대 - 현판은 은초 정명수(1909-2001) 선생이 씀.
<사진 23> 촉석루에서의 남강 모습.
<사진 24> 촉석루의 단청은 화려함이 없는 실용성이 있는모습이다.
<사진 25> 촉석루에서의 퐁경은 단연 영남의 제일이다. - 현판은 청남 오제봉 선생이 씀.
<사진 26> 촉석루에서 본 의기사(義妓祠) - 논개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사당.
<사진 27> 의기사에 들어가는 문인 지수문.
<사진 28> 의기사 - 논개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사당.
진주 의기사(晉州 義妓祠)
경상남도 문회재자료 제7호.
의기사는 1593년 제2차 진주성 전투로 왜장을 안고 남강에 몸을 던져 죽은 의기 논개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이 사당은 영조 16년 경상우병사 남덕하가 처음 세운 뒤 여러 차례 고쳐 지었다.
지금의 사당은 1956년 진주의기창열회에서 힘을 모아 다시 고쳐 지은 것이다.
현판은 관찰사 이지연이 썼고 진주 기생 산홍과 황현의 시판(詩板)과 다산 정약용의 기문(記文)이 걸려있다.
<사진 29> 논개의 영정.
<사진 30> 강쪽의 촉석루 모습.
<사진 31> 의암 윗쪽에 사적비각과 사적비가 있다.
<사진 32> 의기논개지 문
진주 의암사적비(晉州 義巖史蹟碑)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53호
의암사적비는 임진왜란 당시 제2차 진주성전투에서 성이 함락되자 남강의 의암에서 왜장을 껴안고 강물에 몸을 던져 죽은 진주 관기 논개의 행적을 기록한 빗돌이다.
경종 2년에 세운 것으로 진주의 선비 정식이 비문을 지었다.
<사진 33> 남강가의 의암(義巖)
진주 의암(晉州 義巖)
경상남도 기념물 제 235호로 지정되어있다.
의암은 논개가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몸을 던져 죽은 바위다. 논개의 순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의로운 바위’라는 뜻의 '의암'으로 부른다.
바위의 서쪽면에는 인조 7년 진주고을 선비 정대륭이 새긴 ‘義巖(의암)’이란 글자가 있다. 남쪽면에도 진주 고을 선비 한몽인이 썼다고 전하는 ‘義巖(의암)’ 글자가 새겨져있다.
경종 2년(1722)에는 의암사적비를 세워 논개의 의로운 행적을 기록하였다.
이 곳에 새겨진 ‘義巖(의암)’이란 글자를 통해 논개가 순국한 장소를 확인할 수 있어 역사의 현장으로서의 가치가 있다.
<사진 34> 의암에서 본 의암 사적비, 진주성 그리고 촉석루.
<사진 35> 촉석루와 진주성.
<사진 36> 다리의 그림자도 아름답다.
<사진 37> 촉석루를 다시 보다.
<사진 38> 촉석루 앞의 석류나무가 잘 자랐다.
<사진 39> 옆에서 본 촉석루.
<사진 40> 호국종각에 있는 호국종.
<사진 41> 잘 자란 느티나무.
<사진 42> 옛 유적지에 오면 이렇게 잘 자란 나무들이 많아서 좋다. 사진은 진주성 주변에 있는 나무들.
<사진 43> 성벽에서 자란 느티나무.
<사진 44> 임진왜란 당시의 무기는 현자총통, 지자총통, 천자총통.
<사진 45> 성벽의 나무들은 당시의 사실을 알고 있을까?
오늘의 살핌을 마치면서 논개의 충열을 기린 변영노 詩人의 멋진 詩가 있어 올려본다.
논 개
변 영 노
1.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은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낭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2. 아리땁던 그 아미 높게 흔들리우며
그 석류 속 같은 입술 죽음을 입맞추었네.
아, 강낭꽃 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븕은 그 마음 흘러라.
3. 푸르른 강물은 길이 길이 푸르리니
그대의 꽃다운 魂 어이 아니 붉으랴.
아, 강낭꽃 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 감사합니다. 본 자료는 참고자료를 이용하여 작성하였습니다.
'견문은 넓게' 카테고리의 다른 글
165. 男兒二七成何事 - 의병장 신돌석(申乭石)을 보다. (0) | 2022.01.15 |
---|---|
164. 단산지 둘레길을 걷다. (0) | 2022.01.08 |
162. 경산 자인의 계정숲에서. (0) | 2021.12.26 |
161. 애국지사 석천 백남채(石泉 白南埰)선생 묘역에서. (1) | 2021.12.24 |
160. 국립 신암선열공원에서. (0) | 2021.12.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