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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 포항 입암서원(立巖書院)을 중심으로.

죽림, 대숲, 사라미 2019. 1. 28. 06:50



            포항 입암서원(立巖書院)을 중심으로.


   1. 날 짜 : 2019년 1월 23일

   2. 동 행 : 나미회 회원

   3. 이야기

        입암서원은 포항시 북구 죽장면 입암리에 있는 서원이고, 이 일대에 만활당과 일제당 등이 같이 있다. 각 건물들에 대한 내용을 살펴보면.
       입암서원(立岩書院)은 조선 효종 8년(1657년)에 처음 건립되었으며,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1554-1637), 권극립(權克立), 정사상(鄭

       四象), 손우남(孫宇南), 정사진(鄭四震) 등을 배향하고 있다. 그 후 고종 5년(1868년)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고, 순종 원년

       (1868년)에 묘우(廟宇)가 소실되었다. 서원은 1913년에 복원되고, 1972년에는 묘우 역시 새로 만들어졌다.

       서원 주변에는 일제당과 만활당이 건립되어 있다. 일제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선조 33년(1600년)에 건축되어 장현광,

       정사진, 손우남 등이 학문을 강론하였던 곳이다.

       1629년에는 노계(蘆溪) 박인로(朴仁老)가 와서 입암가(立巖歌) 29수와 입암별곡(立巖別曲)을 남기기도 하였다.

       만활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막돌로 3단의 기단을 쌓아 그 위에 초석을 놓은 후 둥근 기둥을 세운 3량가홑처마 굴도리집

       이다(자료에서).


       <입암서원(立巖書阮)에 대하여>


       <자료 1>  포항시 북구 죽장면 일원리 앞을 지나다 보면 사진과 같은 은행나무와 향나무가 자라고 그 옆으로 서원이 보이는 곳이 있는데 이

                   곳이 입암서원이다. 향나무는 보호수가 아니고 그 옆의 은행나무가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자료 2>  입암서원 모습.



       <자료 3>  입암서원에 대하여.



       <자료 4>  입암서원 앞에서 자라는 은행나무는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자료 5>  은행나무의 나이가 300년이 넘는데, 그 옆의 향나무도 자람이 거의 같을것으로 생각된다.

                   두 나무 모두 보호수로 지정되었으면 좋겠다.



       <자료 6>  보호수 은행나무 - 일부분 외과 치료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자료 7>  서원 일대에 잘 자란 소나무들이 많이 보인다. 서원에서 관리하는 것으로 보인다.



       <자료 8>  서원 쪽에서 바면 앞으로 건너다 보이는 건물이 일제당이다.



       <자료 9>  동봉 권선생 유허비.



       <자료 10>  소나무 줄기의 무늬 모양.



       <자료 11>  주변에 잘 자란 소나무숲.



       <자료 12>  잘 자란 느티나무 한 그루도 보인다.




       <만활당(萬活堂)에 대하여>


       <자료 13>  만활당(萬活堂)은
                    포항시 북구 죽장면 입암리 183에 있으며 경상북도 기념물 제70호로 지정되어 있다. 정면 3칸, 측면 단칸의 박공기와지붕 구조

                    인 만활당은 계류가 굽이쳐 흐르는 언덕 위에 서향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조선중기 성리학자인 여헌 장현광이 임진왜란 때 피난

                    와서 기거하던 은숙사(隱宿舍)로 사용하던 건물이다(자료에서).



       <자료 14>  만활당 전경.




       <일제당(日蹄堂)에 대하여>


       <자료 15>  일제당(日蹄堂)은
                    포항시 북구 죽장면 입암리 190번지에 있으며 경상북도 기념물 제70호로 지정되어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구성된 일제당은 조선 선조 33년(1600년)에 건축되어 여헌 장현광, 수암 정사진, 운암 손우

                    남 등이 학문을 강론하던 곳이며 1629년에는 노계 박인로 선생이 내유하여 입암가 29수와 입암별곡을 남기기도 하였다. 1907

                    년 산남의진(山南義陣) 사건으로 일본군이 방화하여 소실되었던 것을 1914년 복원하였다(자료에서).



       <자료 16>  일제당에 대하여.



       <자료 17>  일제당 앞의 바위가 명품이다.



       <자료 18>  일제당 전경이다. 건물이 날아갈 듯 자라를 잡았다.



       <자료 19>  일제당이 주변의 경관과 아주 잘 어울린다.



       <자료 20>  일제당 모습이 정말 환경에 잘 어울리는 모습이다.



        ※ 산남의진(山南義陣)은?
            구한말 대표적 의진으로 1905년 강제로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일제의 침탈에 항거하여 영천을 중심으로 경북 남동부 일대에서 위세를 떨친 의병 진영을

           말한다.
           1906년 나라를 구하라는 고종의 밀지를 받고 영천시 자양면 출신의 정환직, 정용기 부자에 의해 의진이 결성되어 두 장군은 전과를 많이 올리고 1907년

           에 순국하게 된다.
           1908년에 보현산 아래 천년고찰 거동사에서 먼저가신 두 장군과 의병들의 위령제를 모시고, 흥해출신 최세윤을 대장으로 추대하여 다시 의진을 봉기하

           여 끝까지 항전하였다(자료에서).




    ※감사합니다. 입암서원 주변의 모습을 소개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