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문은 넓게

182. 돌담의 아름다움 군위 한밤마을.

죽림, 대숲, 사라미 2022. 9. 25. 08:53

 

 

<돌담의 아름다움 군위 한밤마을.>


1. 날짜 : 2022년 9월 21일
2. 동행 : 가족탐방
3. 이야기
 군위 한밤마을을 찾았다. 
주소를 보니 경상북도 군위군 부계면 대율리. 
지금 까지 제주도 하면 바람 많고 돌도 많은 곳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제주도의 돌은 구멍이 뚫린 시꺼먼 돌이다. 그런데 이 곳 대율리의 돌담은 모양도 색도 좋은 화강암의 돌로 예사롭지 않은 기운을 주는 돌이다. 마을 이름이 대율리(大栗里)인데 이를 우리말로 풀어보면 크다는 대(大)는 순수한 우리말의 ‘한’과 율(栗)의 밤을 뜻하는 ‘밤’하여 ‘한밤’이다. 지금 까지 사람들에게 알려진 바로는 한밤마을은 돌담으로 우리나라 전체에 알려진 마을이다.

이 곳을 가려고 10시에 집을 나섰다. 군위군의 동산계곡 맞은편으로 내렸는데, 가까운 거리에 생각지도 못한 마을이 있다는 사실을 오늘 처음 알게되었다. 실제로는 오늘이 9월 21일은 양력으로 내가 태어난 날이고 또 수요일로 대경예임회에 가는 날이다. 오늘 가기로한 백무동의 한신계곡은 정말 마음에 들었던 곳이다. 그러나 계획인 코로나 4차접종이 예정되어 있었지만, 몸 상태가 좋지않아서 접종을 취소하였고, 이어서 대경예임회 활동에 가려고 했지만 갈 형편이 되지않아서 포기하고 이 곳을 찾게 되었다.

널리 알려진 한밤마을의 돌담은 마을 전체가 돌담으로 둘러싸였다. 집집마다 둘러져 있는 돌담들 사이를 걸으니 돌담길이 되었다. 처음 이 돌담을 보았을 때 어떻게 하여 이렇게 많은 돌을 구하여 이용하였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대답은 예전에 큰 홍수가 나고 집이나 논밭을 알구는 과정에서 땅 속에서 나온 돌을 쌓아올린 것이 오늘의 돌담이 되었다 한다. 제주도의 돌담이 쌓이게된 사연과 일맥상통한다. 그래도 그렇지 어쩧게 이렇게 많은 돌이 묻혀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어디서 모아서 실러온 것은 아닐텐데 그렇다면 집을 짓거나 농사를 짓기 위해 터를 일구는 과정에서 나온 돌이라는 것을 믿어야 할 입장이다.

제주도가 아닌 아름다운 돌들을 모아서 돌담이된  돌담길을 걸어보는 느낌도 새로웠다. 
이 마을은 부림홍씨(缶林洪氏)들이 모여사는 집성촌이다. 또 이 마을에는 고려시대에 지어진 대율리 대청과 역사가 깊은 고택인 남천고택과 부림홍씨종택 등 여러 고택들이 즐비한 마을로 역사와 전통이 깃든 마을이다.

  
이 마을에서 살필수 있는 나무들은 남천고택 안에서 자라고 있는 잣나무 한 쌍은 나이가 250년 되는 나무로 다른 곳에서는 이렇게 일부러 심은 경우를 찾기 힘드는 경우이고 또 마을 입구에 있는 대율리 송림은 함밤마을과 함께 지내온 일들과 역사를 말하여 주고도 남는다. 이 솔밭에는 홍씨집안과 홍씨집안의 나라사랑한 애국정신으로 활동한 두 분의 애국지사 기념탑과 그 업적을 후세에 전하기 위한 비석도 서 있다. 
한 마을에 이렇게 살필거리가 많은 곳도 드문 실정이다. 남천고택에는 울타리에 솜대와 더불어 호두나무, 예부터 양반이 이사를 가거나 신부가 시집을 갈 때 꼭 가지고 갔다는 쉬나무도 지라고 있다. 전국에는 돌담의 아름다움으로 알려진 마을이지만 이 마을이 있는 이 곳은 예전에는 큰 절이 있었던 곳이라고 전해지고있다.

또 이 마을은 팔공산은 끼고 모든 집들이 환경에 맞게 북서향으로 위치하고 있다. 비록 가까운데도 늦게 찾은 마을이지만 실제로 보고 많은 것을 깨닫게 해준 하루였다.
마을 전체가 역사와 전통을 이야기하는 속에서 시간 가는줄도 모르고 살폈다. 어느듯 시간은 오후 1시를 지나고 있다.  늦은 점심을 이 곳의 식당에서 해결하고, 돌담과 함께 햇볕에 유난히 빨갛게 핀 유홍초를 보면서 마을을 떠났다.


언젠가 다시 주어지는 시간이 있으면 산성중학교에 만들어진 ‘엄마 아빠 어릴적에’ 주제로 운영되는 산 역사의 현장을 다시 살펴야한다고 생각하면서 오늘을 정리하였다.  

<한밤마을의 아름다움>

 

 

 

 

 

<한밤마을의 대청> - 대율리 대청(大栗里 大廳)

경상북도 유형 문화재 제262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한밤마을 가운데에 자리하고 있다. 
이 건물은 조선 전기에 세워졌으나 임진왜란 때 불탔다. 인조 10년(1632)에 다시 지어 학생들의 글을 가르치는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효종 2년(1651)과 숙종 32년(1705)에 다시 고치고 현재에 이르렀으며 현재는 마을의 중요한 일을 의논하고 또 경로당으로 활용하고 있다. 규모는 앞면 5칸 측면 2칸으로 기둥이 둥근 다락집의 형태이다. 
마루는 우물마루이며 천정은 서까래가 그대로 드러나지만 꾸밈이 없는 갼결하고 소박한 건물이다. 

 

 

 

 

<한밤마을의 남천고택과 한 쌍의 잣나무>

 

 

 

<한밤마을의 부림홍씨 종택>

 

 

 

<한밤마을의 송림>

한밤마을 입구에 송림이 조성되어 있다. 나이가 몇 백년 이상으로 싱싱하게 아주 잘 자라고 있는 숲으로 여러 면에서 이용되고 있는 솔숲이다. 이 솔밭에 세워진 두 개의 비가 여기에 있는데 그 내력은 다음과 같다.

 

이 곳 솔밭에 세워진 두 개의 비석은 1582년 일본이 30만 군사를 알으켜 우리나라를 침범한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나라가 바람앞에 등불처럼 위태로울때 선비의 몸으로 분연히 일어나 일가친척과 주민을 모아 의병을 조직하고 이 곳에서 훈련하여 당시 일본군의 주요 보급로 거점인 영천성을 수복하는데 선봉장이 되어 화공으로 적을 물리친 송강 홍천뢰 장군과 군량 조달과 작전 까지 수행하여 전공을 세우신 조카 혼암 홍경승 선생의 공적을 기리어 업적을 후세에 전하여 큰 교훈의 장으로 삼고자 추모비를 여기에 세우 오늘에 전한다"(참고문에서)

 

 

 

<한밤마을의 거리>

 

 

 

<군위 대율리 석조여래입상>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