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이 좋아서

371. 고모령(顧母嶺)을 찾아서.

죽림, 대숲, 사라미 2016. 1. 4. 16:33

 

 

           고모령(顧母嶺)을 찾아서.

 

    1. 날 짜 : 2015년 1월 3일 일요일

    2. 동 행 : 자유인과

    3. 이야기

          오늘은 비내리는 고모령의 배경이 되었던 고모령을 찾으러 집을 나섰다. 내 고장에 이런 역사가 숨겨진 곳들이 많은데 지금 까지 너무

        소홀히 지나친것 같은 감이 들었다. 고모령에 대한 전해오는 이야기는 여러 가지가 있다. 어머니가 감옥에 있는 독립군 아들을 만나고

        돌아오면서 아들에 대한 애틋한 어미의 심정을 나타냈다던가 또 일본의 억압 속에서 징용으로 끌려가는 아들과 어미에 대한 내용, 또

        마을 사람들에게 전해져오는 어미를 위해 자식을 희생한 부부의 애틋한 효행 이야기 등이 전해져 온다.

        오늘은 유호 작사, 박시춘 곡, 현인이 노래한 '비내리는 고모령'이 내가 살고 있는 고장에 있어 그 현장을 보고 싶어 떠난 길이었지만,

        고모령과 비내리는 고모령의 노래비는 보지못했다. 노래비는 보려면 볼 수 있었지만, 노래비를 보는 것보다 역사적인 고모역을 보는

        것이 더 뜻이 있을것 같아서 고모역을 택했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다시 노래비가 있는 곳에서 역순으로 철새가 날아드는 모습을 보는겸

        다시 찾을 날을 기약하고 탐사를 마쳤다.

        지난 번에 임진왜란 때 우리 나라에 귀화한 일본 장수 김충선을 모신 사당을 달성군 가창에서 찾았는데 오늘은 늘 명나라를 그리워하며

        우리 나라에서 생을 마감한 풍수의 대가 두사충을 모신 모명재를 살피고 고모령을 살펴서 역사의 자취를 살핀 탐사로 되었다. 

        아쉬운 점은 고모령이 역사적으로 값어치가 있다고 생각되긴 한데 현재는 볼 수 없는 일이라 아쉬움이 남는다. 형봉과 제봉 사이에

        고모령에 대한 사진이라도 게시하여 두었더라면 대리만족이라도 할 수 있었을건데. 아니면 직접 볼 수 있는 방안을 찾을 수 있다면 더욱

        좋은 일이라 생각하면서 수성2번 시내버스에 몸을 싣고 지하철 2호선 연호역으로 달렸다.

 

 

    <사진 1>  지하철 2호선 만촌역에서 내려 만촌2동 주민센터 앞을 지나서 100m 정도 가면 누군가는 시골 같은 골짜기라 한 길이 나타난다.

               지금은 개발을 하고 있는듯 들어가는 길이 좁으나 안내는 되어 있다.

               만촌역 - 모명재 - 형봉 - 제봉 - 고모역 - 수성2번 버스로 지하철 2호선 연호역으로 이동 - 귀가..

 

 

 

     <사진 2>  타이어점 앞으로 횡단보도를 건너서 왼쪽으로 100m 정도 가면 오른쪽으로 안내된 길이 나온다..

 

 

 

     <사진 3>  배풍등의 빨간 열매가 햇빛에 더욱 아름답게 보인다.

 

 

 

     <사진 4>  오른 쪽으로 산길에 접어들어서 걷는다.

 

 

 

     <사진 5>  길 옆에 있는 집 담장에 인동덩굴이 아주 잘 자랐다. 반상록성이라서 그런지 아직 잎을 달고 있다.

 

 

 

     <사진 6>  백화등이 빨간 단풍을 달고 겨울을 나고 있다. 열매의 모양도 보인다.

 

 

 

     <사진 7>  모명재(慕明齋)로 내려가는 길이다. 리키다소나무와 상수리나무들이 많이 보인다.

 

 

 

     <사진 8>  두사충은 명나라의 제일 가는 풍수의 대가였다.

 

 

 

     <사진 9>  동네 어귀에서 바로 보이는 모명제 모습.

 

 

 

     <사진 10>  길 옆에는 박태기나무가 심어져 있다. 이 곳을 찾는 중국인 관광객들이 많다고 하며 중국 사람들이 즐겨하는 꽃과 나무들을

                 심었다고 한다.

 

 

 

     <사진 11>  모란도 심어져 있다.

 

 

 

     <사진 12>  명정각에 대한 이야기로 두사충의 7대손 두한필에 대한 이야기다. 주제는 "조상을 빛내는 효"

 

 

 

     <사진 13>  명정각 모습이다. 곧 7대손 두한필에 대한 효자각이다. 

 

 

 

     <사진 14>  앞에서 본 명정각이다 안에 효자비가 서 있다.

 

 

 

     <사진 15>  명정각에 심어진 배롱나무.

 

 

 

     <사진 16>  모명재(慕明齋) 모습이다. 들어서는 문은 '만동문(萬東門)' 이다.

 

 

 

     <사진 17>  모명재에 대하여.

 

 

 

     <사진 18>  두사충은 누구인가?

 

 

 

     <사진 19>  문 안으로 들여다본 모명재.

 

 

 

     <사진 20>  만동문을 들어서면 바로 보이는 모명재.

 

 

 

     <사진 21>  모명재의 안 모습.

 

 

 

     <사진 22>  공덕비외 신도비.

 

 

 

     <사진 23>  결국 두사충은 명나라로 돌아가지 않고 우리 나라에 귀화하여 대구에 뿌리를 내렸다.

 

 

 

 

     <사진 24>  명나라에서 가져온 청석으로 문인석을 만들었다. 경내에 마주보고 세워져 있다.

 

 

 

     <사진 25>  또 하나의 청석 문인석.

 

 

 

     <사진 26>  이순신 장군과의 우정도 두터웠다 한다.

 

 

 

     <사진 27>  나무가 자랄것을 생각하여 공간을 두고 담을 쌓았다. 그러지말고 담을 조금 들여쌓든가 내어서 쌓으면 될 것을 하필 이렇게

                 쌓아야 할 까닭이 무엇인가? 이 곳에 설치된 CCTV가 사람 따라 움직이고 있다. 없앴으면 좋겠는데?

 

 

 

     <사진 28>  이 산에 상수리나무도 많다. 

 

 

 

     <사진 29>  이 산에 참느릅나무도 많이 보인다.

 

 

 

     <사진 30>  두사충의 묘가 보인다. 모명재에서 약 100m 정도 떨어져 있는데 명나라의 제일 풍수가 잡은 자리는 아니라 한다. 두사충이

                 생전에 잡아둔 자기가 묻힐 자리는 명당이라고 하는데, 아직 어딘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사진 31>  결국 두사충은 돌아가지 않고 이 땅에서 살다 갔다.

 

 

 

     <사진 32>  묘역에 세워진 비석인데 왼쪽의 작은 것이 처음의 비석이고 오른쪽 것은 이 묘역을 다시 가꿀때 세운 것이다.

                 그래도 처음의 비석이 훨씬 나은것 같다.

 

 

 

     <사진 33>  묘의 앞 좌우에 잘 자란 배롱나무가 각각 한 그루 씩 자라고 있다.

 

 

 

     <사진 34>  우리 나라에 뿌리를 내렸지만 그래도 조국이 있었던 두사충이 아니었던가?

 

 

 

     <사진 35>  묘역을 나와 형봉으로 오르는 길에도 나무는 많이 자라고 있고 좌우에는 철망이 쳐져 있다.

 

 

 

     <사진 36>  일반인의 접근을 금하는 철망이 계속된다.

 

 

 

     <사진 37>  계속 오르는 길이다.

 

 

 

     <사진 38>  정릉참나무로 보이는 나무.

 

 

 

     <사진 39>  오르는 길에는 땀을 식힐 수 있는 쉬는 시설이 있다.

 

 

 

     <사진 40>  아까시나무.

 

 

 

     <사진 41>  감태나무.

 

 

 

     <사진 42>  이제 형봉건강쉼터가 가까위지고 있다.

 

 

 

     <사진 43>  이런 길도 있다.

 

 

 

     <사진 44>  리키다소나무.

 

 

 

     <사진 45>  리키다소나무의 잠아는 대단하다. 그러나 재목감은 아니다.

 

 

 

     <사진 46>  형제봉에 대한 이야기 안내.

 

 

 

     <사진 47>  군부대장의 안내판.

 

 

 

     <사진 48>  여기가 형봉정상에 있는 형봉건강쉼터.

 

 

 

     <사진 49>  이제 제봉으로 간다. 부대철망 안에는 잣나무가 줄을 지어서 심어져 있다.

 

 

 

     <사진 50>  형봉과 제봉 사이에 고모령이 있는데 그 정확한 위치는 부대 안에 있다. 가수 현인이 부른 '비내리는 고모령' 노래비다.

                 노래비는 망우공원에 서 있다. 고모령과 관계가 있는 내용이어서 모셔온 자료다.

 

 

 

     <사진 51>  군부대 안에 있는 고모령 표시석. 역시 모셔온 내용이다. 이 길로 경산과 대구로 내왕하였으리라.

 

 

 

     <사진 52>  잘 자란 아까시나무.

 

 

 

     <사진 53>  나무 이름은 모르나 모양이 이상해서.

 

 

 

     <사진 54>  두 나무가 같은 나무인지? 곰의말채나무 같은데?

 

 

 

     <사진 55>  제봉을 오르기 전에 있는 참느릅나무.

 

 

 

     <사진 56>  이건 가죽나무 같은데 잎을 보았으면 좋겠는데 잎은 찾아도 보이질 않는다.

 

 

 

     <사진 57>  제봉을 오르는데 모감주나무가 많이 보인다.

 

 

 

     <사진 58>  철망 밖에도 잣나무를 심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사진 59>  제봉에 도착해서 내려가는 방향을 바꾼다. 오른쪽 고모역 쪽으로.

 

 

 

     <사진 60>  제봉을 지나서 있는 건강쉼터다. 이제 고모역으로 간다.

 

 

 

     <사진 61>  고모령쉼터.

 

 

 

     <사진 62>  군부대장의 경고문.

 

 

 

     <사진 63>  고모령을 내려가는 길.

 

 

 

     <사진 64>  길 안내봉인데 따라가면 출입이 금지된 길이 나타난다. 좀 이상한 안내봉이다.

 

 

 

     <사진 65>  능선에는 소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다. 재목이 될만한 것은 적지만 그래도 공기를 맑게하는 역할은 한다.

 

 

 

     <사진 66>  리키다소나무 두 그루가 이렇게 엿가락 같이 꼬여서 자란다.

 

 

 

     <사진 67>  산을 내려오면 이렇게 넓은 도로도 있고 열차가 달리는 철로도 있다. 이 길에 고모역도 있다.

 

 

 

     <사진 68>  지금은 문을 닫은 역이지만 한 때 많은 사람들이 이용했던 고모역.

 

 

 

     <사진 69>  고모역 앞에 역사를 말해주는 오래된 측백나무가 두 그루 자라고 있다. 지금은 고모문화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사진 70>  역사 속에 묻혀진 고모역이다. 지금도 무궁화 열차는 이용할 수 있었으면 좋으련만 나무 경제적인 측면만 생각함이 아닌가?

 

 

 

     <사진 71>  오늘 돌아본 길을 다시 생각해 보았다. 빨간색으로 표시된 길이 오늘 탐사한 길이다.

 

 

 

 

 

 

 

 

 

 

      ※  감사합니다. 역사의 뒤안길에 있는 사실들이 많은데 계속 탐사해볼 예정입니다.